상단영역

본문영역

<여주와 강변칠우>여강은 알고 있다. 강변칠우 사건 그 내막 ⑰

<여주와 강변칠우>여강은 알고 있다. 강변칠우 사건 그 내막 ⑰

  • 기자명 여주신문
  • 입력 2017.11.27 14:45
  • 0
  • 본문 글씨 키우기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여주 유생들이 상소를 하다 -1

 

성흥환(전 한국문인협회 여주지부장)

광해 5년 계축(1613)에 여주 서원 유생 성여격(成汝格) 등이 상소로 기천서원의 사액을 청하였으나 기다리라는 비답뿐이었다. 이때는 간신들이 내분을 만들어 온갖 속임수로 조정을 어지럽게 하면서 인목대비에게 까지 화를 미치게 하여 온 나라가 경악하였으나 아무도 감히 지적하여 배척하지 못하였는데 서울 유생 이안진(李安眞)과 권심(權?) 등 24명의 상소로 시발이 되었다. 성균관과 사학의 유생들이 주동이 되어 300여명이 항거에 동참하여 복합상소를 올리면서 정조(鄭造)와 윤인(尹?) 그리고 이위경(李偉卿) 등의 무리들이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를 저버린 죄를 바로 잡도록 요청하였다.

이렇게 폐모의 논의가 뜨겁게 달아오르던 여름 어느 날 진사 성여격(成汝格)의 집에 편지 한 통이 전달되었는데, 그것은 서울에 있는 장의 한복윤(韓復胤)이 보낸 것이다. 수암 한복윤 선생은 당시 성균관 유생으로 성진사와는 동갑계의 막역한 친구 사이다. 편지의 내용은 [‘기천서원 사액에 있어 기다리라는 비답의 이유를 잘 알고 있겠네만 당권이 바뀌기 전에는 옥사(獄事)가 많아 좀 그러할 것 같네. 정장령을 자네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여주에서 정장령한테 자주 와서 만나는 사람과 그 끄나풀들이 누구 누구인지 짐작이 가리라 믿고.... 얼마 있으면 대비건에 대한 통문이 내려갈듯 하니 그리 알게나.’] 였다. 성진사는 서찰을 접어 쥐고 먼 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여주에서도 서울 유생들의 통문에 따라 강상(綱常)을 저버린 무리들에 항거하여 정조(鄭造)의 이름을 삭제하고 또 성균 유생들을 후원하려 상소문을 올려서 그를 처벌하라고 청하기에 이르렀는데, 당시 원장이었던 이안성(李安成)도 제지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일단 상소문을 봉하여 올라가 도착할 무렵, 이미 광해 임금이 크게 노하여 이르기를, [“유생들이 소를 올린 것도 옳지 못하거늘 여러 도에 통문을 돌려 불러 모으기 까지 한다 하니, 장차 어쩌자는 것인지 이런 조짐을 키울 수 없어 마땅히 엄히 다스려 법에 따라 죄를 정할 일이로되 이안진(李安眞)과 권심(權?) 등은 유적에서 삭제하고 종신토록 금고시키며 문외송출하여 어지럽고 시끄러움을 가라앉히라.”] 하였다.

이로 인하여 올라간 상소가 중지되었는데, 대북파의 시배들은 이때부터 주동자인 진사 성여격(成汝格) 등을 비롯하여 가담한 유생들에 대하여 곱지않은 눈초리로 바라보기 시작하였다. 이 당시 이이첨(李爾瞻), 정조(鄭造) 등에게 자진하여 당파에 빌붙어 뜻을 얻은 모(某)진사는 탐학하게 굴면서 재물을 긁어 모아 지역 사람들이 그에게 피해를 본 나머지 원망과 저주하는 소리가 여주 경내에 흘러 넘쳤기에 서원의 유림들 모두가 그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와중에 서원 유생 이현문(李顯門)은 허국(許國), 이득양(李得養) 등 여러 유생들을 연명으로 하여 폐모반대 상소를 올렸다. 웅천일록 을묘년 윤 8월을 보면, [“대비를 폐하면 인심을 잃고 대비를 붙들면 인심을 얻는다.”고 주장한 여주 생원 이현문(李顯門), 허국(許國) 등을 잡아 가두었다.]

이렇게 약헌 이현문 선생은 이이첨(李爾瞻), 정조(鄭造) 등의 눈에 거슬려 곧바로 투옥되었던 것이다.

이런 저런 모든 일과 관련하여 이첨(爾瞻)이 모진사에게 이르기를, “자네 고향 여주는 기좌에서 문헌의 고장으로 이름난 곳이라 들었느니라.” “예, 그러하옵습죠.”

“그런데 자네가 그런 위치에 있으면서 어떻게 원유가 이론을 제기하게 만들도록 하여 일개 유생들을 통솔하지 못한단 말인가?” 하니, 그는 무안하여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리하여 어느 날 그는 술 한 병을 들고 첫 번째로 성진사 집을 방문했다.

“이리 오너라.”

“진사나리! 손님이 오셨습니다요.”

“아이구! 이거 임진사님이 웬일이시오?”

“예! 그간 안녕하셨사오이까?”

“길복아 여기 술상 좀 봐 오도록 하거라.”

두 사람은 정중한 얼굴로 주안상을 가운데 놓고 마주했다.

“이 술은 우리 집에서 담근 술이온데 성진사 생각이 나서 가져 왔소이다.”

하면서 성진사에게 먼저 술을 권한다.

“아함! 거 참 술맛이 좋소이다.”

이렇게 종일토록 겸허하고 화기애애한 대화로 술잔이 오고 갔다. 그러다 취기가 한껏 오르자, “성진사! 협조 좀 해 주시오. 솔직히 말해서 봐 달라는 말씀이외다.”

“임진사님!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우리 여주 경내에서 대북의 영수이신데 ...”

“성진사 위치에서 나와 손잡고 일을 하면 무슨 벼슬은 못하며 그 어떤 일인들 성사 못하오리까? 그게 성공의 길이요 성진사 입명의 기회이기도 하오이다.”

“임진사님 취담 같으시이, 그만 하시구려.”

“취담 이라구요? 성진사 깊이 생각하시오.”

“어허! 임진사 진정하시오.”

“어허라구요? 지금 내 말을 듣지 않으면 훗날 후회가 많을 것이오.”

하며 임진사는 그럴 듯 솔깃하게 권유도 하고 혹은 화복으로 공갈도 치며 만단의 동요가 날이 저물도록 계속되었다. 이에 성진사는 정좌하여 옷깃을 여미고 안색을 바로 지으며 대답하되, “내가 차라리 산중에서 시들어 말라 죽을 망정 어찌 어머니 버리는 세상을 나가겠소? 나의 뜻은 굳혀 있으니 다시는 그런 말 하지 마시오.” 하고 말하자,

“성진사! 그래요? 어디 두고 봅시다. 정말로 참 너무 하시구려.”

하며, 임진사는 노기를 띠고 옷을 걷어쥐며 벌떡 일어났다. 성진사는 눈을 지긋이 감고 앉아 몸소 지은 국화시(菊花詩) 한 구절을 읊으며 벽에 붙은 시 한편이 의지를 표시하니,

數叢殘菊竹籬東 (수총잔국 죽리동)

憔悴形容與我同 (초췌형용여아동)

歲暮貞姿期自保 (세모정자기자보)

焉能零落北風中 (언능영락북풍중)

이 시가 여주골에 널리 퍼졌으며 그로 인하여 화(禍)의 계기가 되었다고 전한다. 이 앞서 성진사는 경내 이름 있는 유생 10여명을 거느리고 교원에 들어가 명부를 찾아 이첨당에 든 자를 지워버렸는데 당시 정조의 농장이 여경에 있었으며 이름이 지워졌다.

 

저작권자 © 여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기사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