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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 것인가 또 제자리에 있다.

어떻게 살 것인가 또 제자리에 있다.

  • 기자명 여주신문
  • 입력 2017.11.27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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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경(여주심리상담센터장)

오랜 역사 속의 인물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지금의 고민과 별로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 많은 역사속의 인물들도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했고 아파했다는 것이다. 그 가운데 몇몇 인물들을 살펴보면서 우리는 예전의 그 문제를 지금도 고민하고 있고 또 제자리에 있음이다. 이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암시해 준다.

우선 프레드리힉 니체는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삶의 의지에 대해 철저히 사유하는 했다. 그는 인간의 영혼이 자연으로 회귀, 즉 돌아간다고 보고 사는 동안 늘 비슷한 일상에 반복임을 직시했다. 그의 생은 죽음과도 같은 오랜 두통과 함께 엄청난 신체적 고통을 겪었고 이를 벗어나기 위해 온갖 방법을 찾으며 급기야는 1900년 정신과 병원에 입원도 해보지만 별 방법을 찾지 못하자 스스로가 이러한 고통을 벗어나고자 사유했다.

그는 자신의 고통의 정체를 바라보고 자신의 괴로움이 영혼에 대한 종착점을 향한다. 여기서 니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인간의 영혼은 회귀하며 결국은 인간의 삶의 과정 안에 삶이 만들어질 뿐이라는 말이다. 잘 산다는 것은 미래를 위한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삶이 바로 미래를 예측하게 하기에 나는 무엇이 되었으면 좋겠다가 아니라, 이것이 곧 ‘나’ 인 것이다.

영혼이라는 단어의 속 안에는 스스로 움직인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그럼으로 매일 일상 속에서 반복하는 오류를 경계 해야만 한다. 이러한 일상은 한가지만으로 움직이지는 않는다. TV의 채널이 여럿이 듯 우리의 행동 양식이나 반응도 여러 가지이기에 이중에 오류가 될 만한 언행을 경계해야 한다.

또한 인물로는 베토벤의 삶을 보면 늘 불안과 외로움 안에서 음악을 한다. 하지만 베토벤 역시도 자신의 삶에서 추구하고자 하는 것을 고민하고 힘들어 했기에 그러한 고통이 자신의 작품 안에 녹아있다. 누구는 그를 돈을 쫓아가던 속물이라 하지만, 그는 늘 조카를 돌보는 의무를 다하기 위해 강박적으로 연연해한다. 그에게는 이러한 혈연적 애증이 그를 존재케 하지 않았을까 싶다.

당신은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기를 원하는지 잠시 길을 걸으며 돌아보자. 참 별 것이 아님도 금 새 알 수 있고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원망하거나 이러한 사사로운 감정들은 오랜 자연의 섭리를 앞에 두면 아무것도 아님을 느끼게 한다.

인간의 감정이나 의지는 사회적 관계에서 만들어진다. 즉 자신의 의지적인 행동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지그문트 프로이드 심리학자는 인간은 모르고 한 행동은 그리 많지 않다고 했다. 즉 묻어둔 마음의 우물 덩이에서 퍼 올려진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 말씀 중에도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 마음에 담은 소금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순간에 마음의 소금을 사용하는 필요한 사람이 되라 한다. 우리 주변에는 너무나 진리 같은 진실이 존재한다. 알면서도 늘 다른 길을 선택하는 우를 범하지 않는 것이 어떻게 살 것인가의 선택이라 말하고 싶다.

혼자 고운 늦가을 길을 걸어 거칠어진 마음을 회복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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