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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칼럼>아름다운 음유시인 조동진

<음악칼럼>아름다운 음유시인 조동진

  • 기자명 박관우 기자
  • 입력 2017.09.22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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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우(여주라디오 방송국장)

지난달 28일 음유시인으로 불리던 가수 조동진이 사망했다. 그의 음색에는 짙은 슬픔이 깔려있지만 어느 곳에는 작은 희망이 보였다. 7,80년대 암울한 상황의 대학가에서는 저항적인 포크음악이 주류를 이뤘지만 그는 순수한 사랑, 자연, 이별 등을 노래한 시인이었다. 그의 가사와 아름다운 선율을 읊조리듯한 음성은 감수성 많던 사춘기 청춘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환기시설이 없던 옛날 탄광에는 독가스에 대한 사고가 많았고 그에 대한 대비로 카나리아와 함께 들어갔다고 한다. 메탄이나 일산화탄소에 민감한 카나리아는 평소에는 지저귀다가 가스가 발생하면 바로 죽어버리기 때문에 광부들이 탈출하는데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예술가라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그들은 카나리아처럼 세상을 관찰하는 사람이다. 그들은 하나의 작품이 만들어질 때까지 무수히 세상을 관찰하고 영감을 얻는다. 그리고 그의 방식으로 작품을 만든다. 털 한 올까지 그렸던 조선시대의 초상화도 있고 전쟁의 참상을 그린 피카소의 게르니카도 있다.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백남준의 비디오아트까지 그들은 그들의 방식으로 세상을 보고 예술행위를 한다. 

그렇다면 예술가들의 작품이 모두 다른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 다를수도 있고, 세상을 보는 관점이 다를 수도 있고, 농담이지만 시력과 청력이 다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정치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질 수도 있고 어떤 이는 사랑에 대해, 자연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 있다. 그들의 관심은 우주의 별처럼 모두 다를 수밖에 없다. 

군사독재를 겪었던 우리나라의 예술은 모두 반정부 투쟁의 기치를 들어야 했을까? 그 당시는 사랑도 없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했을까?

획일적인 사고를 강요하는 독재정치도 문제지만 독재 시대에 반정부 운동에 동참하지 않고 사랑을 이야기하고 자연을 노래했다는 이유로 비판 받는다는 것은 그것 또한 하나의 교조주의이다. 앞에서 이야기 했지만 우주는 수많은 별이 있고 다양한 생각을 하고 있다. 그래서 다른 이의 생각을 존중해야 한다. 

“내가 처음 너를 만났을 때 너는 작은 소녀였고 머리엔 제비꽃 너는 웃으며 내게 말했지 아주 멀리 새처럼 날으고 싶어” (제비꽃 노래말 중)

“울고 있나요 당신은 ...아직도 남은 별 찾을 수 있는 그렇게 아름다운 두 눈이 있으니” (행복한 사람 노래말 중)

지금 나이가 되어서야 이제야 포용이 무엇인지 다양성이란 무엇인지 아니 자연의 생물은 왜 그렇게 다양한 지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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