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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와 강변칠우>여강은 알고 있다. 강변칠우 사건 그 내막⑪

<여주와 강변칠우>여강은 알고 있다. 강변칠우 사건 그 내막⑪

  • 기자명 여주신문
  • 입력 2017.08.28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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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남 역적의 우두머리가 되다

 

성흥환(전 한국문인협회 여주지부장)

일찍이 심우영은 소양강 상류 깊은 산골에 어렵게 살고 있었는데 서양갑과 허홍인의 권유로 기유년에 여주 양화강가에 땅을 일궈 농사를 짓게 되었다. 그러나 밭은 황토 괴질흙에 메마르고 논은 모래땅으로 곡식이 잘 되지 않았다.

더구나 박응서를 비롯해서 여러 사람들이 모여 들어 묵새기며 맨날 풍월만 읊으니 살림살이는 뒷전이고 세월은 강물이었다. 그러다 보니 응서 바람에 도둑 소굴이 되었고 대북풍의 회오리에 역모를 논의한 본거지가 되고 말았다. 

대북의 이첨은 역모 조작에 걸려든 서자 일당을 이용하여 김제남과 교유가 되는 사람과 없애야 할 사람들을 공개 석상에서 내불게 끔 만들어 애꿎은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멸족의 화를 당하게 된 것이다. 박응서가 진술한 내용에도 거론되고 박종인과 서양갑 그리고 허홍인 등이 승복한 공초 중에 정협(鄭浹)의 이름이 나왔는데 의금부에서 한패가 된 사람들을 낱낱이 밝히라 하여 정협이 아뢰였다.

계축년 5월 15일 [제가 박종인 박응서를 몇 번 보아 압니다만 이의숭에 집을 턴 일은 언제인지도 모르오니 그때의 공좌부를 상고하면 제가 가고 안간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기유년에 과거에 올라 주부에 제수되었는데 어찌 두서너 서자들의 무리와 함께 역모를 하였겠습니까? 제가 비록 말단 관리오나 그들이 어찌 감히 저를 향하여 그런 말을 하였겠으며 저 또한 감히 그런 생각을 내었겠습니까? 역모가 보통일 같지 않사온데 어찌 감히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과 일을 같이 하였겠습니까? 기유년 심한 흉년에도 사미를 받아 생활 할 수 있었는데 무슨 부족한 일이 있기에 감히 이런 짓을 하였겠습니까? 설사 사정으로 말하더라도 어찌 나라를 위한 충의에 분한 마음이 없겠습니까? 제가 항상 나라를 위하여 힘을 다 하다가 하루 아침에 역적의 누명을 입었으니 참으로 속히 죽고만 싶습니다. 이제 만번 죽어도 만족 합니다.....] 하였다.

박응서가 공초한 내용과는 전혀 다른 진술이지만 이런 글은 의금부에서만 알고 있을 뿐 정협도 호된 고문에 못견디어 다시 진술하기를, [일찍이 김제남을 사복시에서 만났사온데 말하기를 ‘대군을 추대할 것은 선대왕의 유교를 받은 사람들이 이미 다 아는 일이라’ 하였고 또 김제남이 말하기를, ‘너는 무부이니 우연한 일이 아니다. 훗날 만약 사변이생기면 마땅히 유교를 받은 사람과 함께 논의하여 알리겠다.’ 하였으며, 다음에 대사동 집 앞에서 만났을 때 말하기를, ‘역적의 옥사가 매번 일어나서 인심이 흩어지니 종묘와 사직을 어떻게 하겠는가? 하였습니다. 이것은 대군을 추대 하겠다는 말이었으며 그리고 상감께서 능에 행차 하실 때에 일을 일으키기로 하였습니다.] 하였다.

김제남이 대군을 추대한다는 말을 했고 그 아들과 재상명사라 하는 서인 수십 명을 끌어 넣어 이 사람들이 모두 역모에 참여 하였다고 진술하였다. 그 때문에 파장의 끝이 어디까지인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왜냐하면 김제남의 위치로 볼 때 조정 안팎으로 모르는 사람을 찾기란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가 주모자라 했으니 주변 인물들의 이름이 역적 입에서 나오는 대로 줄줄이 엮일 수밖에 없었다. 

한응인(韓應寅), 박동량(朴東亮), 신흠(申欽), 서성(徐?), 이정귀(李廷龜), 황신(黃愼) 김상용(金尙容), 조희일(趙希逸), 심광세(沈光世), 한준겸(韓浚謙), 최기남(崔起南), 이시익(李時益) 등등 서인과 남인의 중진들이 불려나와 김제남과 공모여부를 진술하고 그와의 관계를 조사 받은 뒤 풀려나거나 유배를 가기도 했다. 

그런데 진술 내용을 보면 역적괴수 정협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무엇이 죄가 되는지 그저 김제남을 안다는 것으로 어리둥절할 뿐이다.

이렇게 말단 관리를 역적 칠서들과 연결하여 색깔이 다른 조정 대신들을 추려 내는데 이용을 하였던 것이다. 역모 조작이란 임금과 직접 관계가 되는 것이므로 자칫 잘못하다가 오히려 당하기 십상이어서 친국이 끝나는 대로 곧바로 죽이도록 하여 뒤탈이 없게 조작자들의 권모술수는 능숙했다. 

박치의와 허홍인은 도망하였는데 여러 날 뒤 늦게 과천에서 이양백(李養伯)에 의해 붙잡힌 허홍인도 죄를 물어 자백케 하여 그날로 참형을 집행하였다. 다만 박치의는 도망을 가서 죽음을 면하였는데 그 때문에 조선 8도에 령을 내려 상금을 걸고 그를 잡는데 공을 세운 사대부에게는 호조판서 2품직을 제수할 것이며, 서민이면 무명베 200필을 준다고 하였다.

박치의가 명나라로 넘어갈까봐 국경의 경비를 강화 시키는 한편 주요 길목과 나루에서 검문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박치의는 머리를 깎고 중이 됐느니 어쩌니 하는 소문만 구구할 뿐 끝내 잡지를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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