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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와 강변칠우>여강은 알고 있다. 강변칠우 사건 그 내막 ③

<여주와 강변칠우>여강은 알고 있다. 강변칠우 사건 그 내막 ③

  • 기자명 여주신문
  • 입력 2017.06.05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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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서 평등을 주장하다

 

성흥환(전 한국문인협회 여주지부장)

양사에 이어 홍문관에서 유영경 무리들의 죄에 대하여 남이공(南以恭), 최기남(崔起南), 이호신(李好信) 등이 상차하기를, “지금 양사가 원흉의 남은 당인에게 죄를 주는 일로 여러 날 논열하고 있는데 성상의 들으심은 더욱 멀어져 윤허를 받지 못했습니다.

신들은 성상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가볍고 적다고하여 죄를 주지 않는다면 신들이 그렇지 않다고 밝히겠습니다. 예로부터 간흉들이 국사를 담당할 적에 당인과 심복들이 옆에서 보좌하지 않았다면 아무리 큰 간흉이라도 마음대로 간교한 짓을 할 수 없을 것이니 죄가 가볍다하여 망설이거나 사실을 결정하지 않아 뒷날 후회하는 일이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쾌히 공론을 따르소서.” 하며 누구는 이렇고 누구는 그렇다며 죄상을 낱낱이 고자질 하듯 죄주기를 청하니, 사신(史臣)이 논하기를, [유영경(柳永慶)이 나라에 권력을 잡았을 때는 남이공(南以恭) 등은 일을 주장하여 힘써 함께하던 사람이 유영경이 패한 뒤에는 남이공 등이 맨 먼저 제창하여 창을 거꾸로 잡고 공격하면서 깊이 유희분과 결탁으로 날뛰고 기탄없이 굴었다.

청북이니 탁북이니 하는 말들을 만들어 내어 영경과 다르다는 것을 보이고 난 다음에 남은 졸개들을 거느리고 영경의 무리를 공박하며 여력을 다하여 기어코 죽이려 하였다. 대각에서 의기양양하게 굴면서 스스로 계책이 이루어진 것으로 여겨 이런짓을 차마 한다면 무슨 짓인들 차마 못하겠는가.] 라고 하였다. 그야말로 조정은 중상과 모략으로 가득차서 칼바람이 불기만하면 피비린내를 풍길 듯한 먹구름 정치판이었다.

이런 와중에 광해군이 적자가 아닌데도 임금이 되었다 하여 양반집에 서자들은 이 기회로 적서 차별을 없애고 벼슬할 수 있는 등용의 길을 열어 달라고 일어났다.

아무리 세력이 있는 자식이라도 아버지는 같은데 어머니가 첩이라는 이유로 같은 형제이면서 차별적 대우를 받고 사니 그야말로 비참하고 억울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입에서 입으로 퍼지고 하여 적서의 차별이 없는 평등한 사회를 주장하며 모여 들었다.

그 앞서 죽은 서인의 거두로 영의정을 지낸 박순(朴淳)의 서자 박응서(朴應犀)를 비롯하여 경기관찰사를 지낸 심전(沈銓)의 서자 심우영(沈友英)과 의주목사를 지낸 서익(徐益)의 서자 서양갑(徐羊甲), 북평사를 지낸 이제신(李濟臣)의 서자 이경준(李耕俊), 평난 공신 박충간(朴忠侃)의 서자 박치인(朴致仁), 박치의(朴致毅), 그리고 허홍인(許弘仁)외에 많은 서자들이 연명하여 상소를 하기에 이르렀다.

여기 모여든 서자들 가운데 서양갑과 심우영 그리고 박응서는 글을 많이 읽고 시짓기도 좋아하였다. 그 무렵 어떤 격식이나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분방한 삶을 좋아 하는 허균(許筠)을 비롯하여 이사호(李士浩), 김경손(金慶孫) 등 서울에 여러 사람들과 가깝게 지냈다.

아무리 서자들이라 해도 글재주가 남다른 까닭에 이들의 처지를 동정하여 학식 있는 여러 사람들이 물심양면으로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허균은 오래전부터 박씨 가문에 적서차별에 늘 불만을 가지고 있는 박응서를 잘 알고 있었는데 그를 따듯하게 대하여 대북파의 동조자로 은근히 만들었다. 박응서의 아버지 박순은 당시에 한시 대가인 이달(李達)의 스승이고 허균이 서류 출신 이달에게 시를 배운 탓에 스스로 서민을 자처하였다.

그리고 서양갑의 아버지 서익은 박순과 함께 동서 당쟁이 격심할 무렵 이이(李珥)를 편들다 서인으로 지목되어 탄핵을 받던 같은 당파의 사이다. 특히 서양갑은 글을 잘하여 허균의 제자라 할 만큼 더욱 친근했는데 허균이 공주목사로 있을 때에 문객으로 관아에 머물러 있었을 정도니까 말이다. 심우영은 허균의 처가로 연줄이 되어 있고 보면 언제나 이들 서자들에 중심에는 항상 허균의 관계가 두텁다.

그리하여 허균과 이사호 등 여러 사람들의 협조로 임금에게 상소를 올렸다. 그 내용의 골자는 세 가지이다. [첫째 우리들의 아버지는 국가에 충성을 다 하여 높은 벼슬에 많은 일을 했습니다. 둘째 우리네는 서자라 하여 차별을 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 생각합니다. 셋째 이제 전하의 너그러운 마음으로 우리들에게 벼슬 길을 열어 주시기 바랍니다.] 하는 것이었다.

임금은 자기의 출신도 서자이므로 해서 언뜻 지난 어느 날이 떠올랐다. 왕세자로서 상감에게 문안차 갔더니, “네가 무슨 왕세자란 말이냐. 누가 너더러 왕세자라 하였기에 왕세자 문안이라 하느냐? 상국에 허락도 없는 왕세자가 무슨 왕세자 행세를 하느냐?”하고 아예 왕세자 운운은 물론 다시 오지 말라고 크게 꾸지람을 받았다.

광해군은 선조의 역정을 듣고는 그만 자리에 엎드려 피눈물을 흘리며 그때 마음속으로 뼈아픈 생각을 했었다. 이것은 영창대군이 늦게 태어났기 때문에 나를 서출이라 하여 이제 찬밥 신세로 푸대접을 하는구나며 불평스러운 심정이 엊그제 같았다. 그래서 적서 차별을 없애고 싶었으나 여러 중신들의 완고한 반대에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조정 대신들의 허락을 받지 못하여 수포로 돌아가자 서얼들은 등용금지법에 대한 불만과 울분이 복받치어 두 주먹을 쥐고 치를 떨었다. 이들은 춘천소양강 상류 깊숙한 곳에 세상 윤리를 무시한다는 뜻에 무륜당(無倫堂)이라는 당호의 집을 짓고 자주 모여서 술을 마시고 시도 읊으며 즐겁게 노는 것으로 마음을 달랬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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