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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우리는 반동도 빨갱이도 아닌 양민이다 ④

<여주>우리는 반동도 빨갱이도 아닌 양민이다 ④

  • 기자명 여주신문
  • 입력 2016.11.11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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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당시 여주지역에서 247명의 민간인이 북한 인민군에게 반동이란 이유로, 남한 군인과 경찰에게 국민보도연맹이라는 이유로 억울하게 희생됐다. 그러나 지금까지 정부의 진심어린 사과와 진실규명을 위한 노력이 없이 지금 우리시대에 잊힌 하나의 작은 사건으로 치부되고 있다.
여주신문은 민간인 학살 사건을 여주시 유족회의 자문과 주민들의 증언을 토대로 4번에 걸쳐 기획시리즈로 보도했다.[편집자 주]


-피랍자에 대한 증언
 

   
 
▶성낙례(87·여)씨는 남편 정달현씨의 피랍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1950년 7월 인민군이 능서로 내려오고, 앞잡이들이 있었다. 인민군 앞잡이들에게 끌려간 것은 인민군 측에서 계속 나오라고 했는데 이에 불응해 결국은 붙잡혀 가고 말았다.
 

능서 농협 뒤 친정 마당에서 저녁마다 회의를 하는데 이모씨가 어디로 나오라고 해서 간 것으로 기억한다. (이모씨는 능서사람으로 인민군치하에서 적극적으로 협력을 했고 그 때를 자기 세상이라고 하며 다녔다고 함. 그는 국군이 들어온 후 조사 받던 중 능서지서마당에 있던 깊은 우물에 빠져 죽었음)
 

그의 강요로 마을에서 5~6명(정달현씨, 문천래씨, 솜틀집 막내아들 등)이 인민군 의용대로 강제로 끌려갔다. 그 가운데 돌아온 사람은 문천래씨 한 명밖에 없다. 문씨의 증언에 따르면, 정달현씨에게 함께 빠져 도망치자라고 했는데, 정달현씨는 죽기 싫으니 그냥 가겠다고 해 강원 홍천쯤에서 끝내 헤어지고 말았다. 이후로 생사를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제사를 지내는데 기일이 피랍된 7월20일로 하고 있다. 묘소는 아예 없다.
 

10년 동안 들에 나가 일을 해도, 친정을 가도 오직 남편의 소식이 왔나 기다렸다. 국군에 들어가 죽었다면 차라리 당당하기라도 하는데, 인민군에게 끌려갔으니, 그 억울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지금도 당시 빨갱이들을 생각하면 이가 갈린다.
 

여동생 정옥방(80·여)씨는 새끼줄을 묶어서 가면서도 도망치면 죽는다고 한 것이 생생하게 기억된다. 작은 오빠는 겁이 많아서 도망치지 못하고 강원 홍천까지 그대로 따라 간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그 동안 무엇을 했나?
 

▶인민군 점령 당시 수많은 양민들이 군인, 경찰, 지주 가족이라는 이유로 잔인하게 학살당했다. 이를 계기로 국군이 다시 남한지역을 수복한 이후 피를 부르는 복수가 시작됐다.
 

이승만 정부는 인민군 점령 하에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모든 주민들을 부역자로 분류한 주민들을 사형까지 시키겠다는 엄벌의지를 밝혔다. 이승만 정부는 처벌의 법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928수복 후 비상사태 하에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을 선포했다.
 

그런데 포고 당시부터 극형이 남발될 위험이 많았으며, 이승만 정부의 초기 패전 책임을 회피하려는 수단이었다고 비판받았다. 결국 부역자 엄벌의 정부 방침은 불법 총살 등 불법적인 치안활동을 정당화시키고 묵인하는 결과를 낳은 것으로 보인다.
 

국군 수복 직후인 1950년 9월 말부터 부역혐의를 받던 여주지역 주민들과 그 가족들이 경찰과 치안대에 의해 연행 당했다. 그 후 이들은 1·4후퇴 직전까지 면사무소 양곡창고 등 임시 유치시설에 감금돼 고문을 동반한 조사를 받았으며, 그 후 여주경찰서 등으로 이송한다는 명분으로 흥천면 계신리 강변, 대신면 보통리 강변과 장풍리 골짜기, 북내면 버시고개, 여주읍 하리 강변 등으로 은밀히 끌려가 총살당했다.
 

결국 여주경찰서 소속 경찰과 치안대는 치안이 회복된 상황에서 연행한 주민들을 불법 감금고문 조사 후 재판 절차 없는 처형한 불법성을 알고 있었다. 총살 의도를 은폐하면서 주민들을 집단 살해한 것이다. 이는 일부 주민들의 단순한 사적 보복행위라고 할 수 없으며 경찰의 지휘 감독과 무관하게 치안대 주도로만 행해진 우발적 행위라고 보기도 어렵다.
 

희생자의 특징에서 확인한 것처럼 희생자들은 대부분 부역혐의를 받던 주민과 그들의 가족이었다. 부역혐의를 받던 주민들의 경우는 당시 포고됐던 특별조치령에 의해 재판 절차를 거쳤어야 했지만, 이런 절차도 없이 집단 총살을 당한 것이다. 더구나 그의 가족들을 희생시킨 행위는 어떠한 법적 근거도 없는 명백한 범죄행위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정부는 6.25전쟁 발발 반세기 동안 사과나 진상 조사조차 없이 억울하게 양민이 죽어간 학살사건을 덮어 뒀다. 문민정부가 출범하고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출범하면서 양민 학살에 대한 진상 조사가 진행되기 시작했다. 2009년 5월18일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양민학살 사건에 대해 진실규명을 결정하고 위원회는 여주주민 98명이 희생당한 것으로 추정했다.
 

2013년 4월22일 법원은 민간인이 집단 처형당한 여주 부역혐의 희생사건의 유가족에 대한 국가 배상 판결이 나왔다. 재판부는 “희생자와 유가족이 겪은 극심한 고통, 사회와 국가로부터 받았을 차별과 냉대·편견과 이로 인한 경제적 궁핍, 국가가 60년 이상의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별도의 조치 없이 손해를 방치한 점 등을 참작했다.”고 설명했다.
 

또한 2011년 5월 국방부 발굴단은 학살 장소로 추정되는 능서면 왕대리에서 시신 33구의 유해를 발굴하고 2014년 4월 이들이 민간인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여주장례식장에 안치했다. 이후 여주시유족회가 조사한 결과 희생자수를 총 240여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화해와 사과
 

▶6.25 전쟁이 발발하고 자유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이념의 갈등으로 많은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했다는 증언이 이어지고 있다. 군인, 경찰 가족 대지주, 보도연맹 가입, 부역 혐의 등으로 피의 보복에 희생양이 돼 버린 일반 양민들 가족이 반세기가 넘도록 가슴의 큰 상처로 고통을 받아 오고 있다. 특히 인민군에게 부역한 혐의로 희생된 양민 가족은 빨갱이라는 누명을 쓴 채 살아왔다.
 

그러나 2015년 여주시는 민간인 희생자를 위한 추모제를 여주시유족회와 함께 진행하면서 화해의 물고를 트기 시작했다. 원경희 시장은 추모제에서 유족과 희생자들에게 사과 의사를 밝히고 희생자 발굴을 위한 조사가 이뤄지고 있다.
 

일부에서는 희생자들 사이에서 양민이 아닌 빨갱이 논란이 일면서 사과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하지만 대다수 희생자들이 쌀과 보리 한 되에 공산주의가 뭔지 모르고 보도연맹에 가입하고 부역을 했다는 것만으로 정식 재판 없이 희생됐다. 특히 4살 아이까지 연좌제란 미명하에 죽음을 당하는 끔찍한 일까지 벌어졌다. 또한 피랍된 사람은 현재까지 생사를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사건이 발생했던 때가 비록 전시 계엄 하에 국민의 기본권이 제한되는 시기였다고 하지만, 군인과 경찰 그의 지휘감독을 받던 치안대가 단지 부역혐의자와 그의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민간인을 살해한 행위는 불법이다.
 

정부는 과거사정리위원회를 통해 양민학살 사건에 대해 진실규명을 결정하고 배상 절차를 밟고 있다.
 

-우린 빨갱이가 아니다!
 

   
▲ 6.25전쟁 당시 억울하게 학살된 양민 247명의 희생을 추모하는 행사가 지난달 8일 양섬 희생지에서 열렸다.

이날 추모제에는 원경희 시장, 이환설 시의회 의장, 이상춘 시의회 부의장, 김영자, 이항진 시의원, 김문영 문화원장, 박영환 유족회장, 임창선 전 여주군수, 신현일 노인회장, 미국 상원의원 출신의 임용근 박사, 유족 및 종교단체인 등 100여명이 참석했다.
 

추모 살풀이, 추모시 낭송 등 식전행사에 이어 천송교회 이동순 목사, 여주성당 설종권 신부, 신륵사 청곡 스님, 원불교 여주교당 백명진 교무의 종교 추모식과 유족결의문, 분향 및 헌화가 이어졌다.
 

박영환 유족회장은 “지금 12곳의 민간인 희생자 발굴사업을 진행하면서 우리가 두 번 다시 겪지 말아야 하는 역사적 교훈으로 삼고 있다.”며 “희생자의 억울한 죽음과 가족들의 피를 토하며 오열하는 뼈아픈 고통을 위로하기에는 미비하지만, 후손들에게 역사적 교훈을 남겨줄 증인으로 유해 발굴, 추모공원 조성에 최선을 다 하겠다.”고 말했다.
 

-마치며
 

▶여주신문은 총 4편에 걸쳐 6.25 전쟁으로 억울한 민간인 희생자에 대해 보도했다. 당시 어린 아이였던 목격자들은 이제는 80을 넘었지만,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을 하고 있다.
 

취재 기간 동안 무고한 생명이 억울함을 간직한 채 희생당하는 전쟁의 참혹함과 잔인함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전후세대인 우리는 알리고 또 다시 아픈 과거를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
 

또한 억울하게 희생된 양민들과 가족들에게 사과와 화해의 손을 내밀어야 한다. 남한뿐만 아니라 북한도 이제는 대치가 아닌 전쟁의 피해자를 위해 진실규명과 사과에 동참해야 한다.
 

【자문=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여주시 유족회
참고문헌=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희생자 여주지역추모사업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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