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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보그

사이보그

  • 기자명 여주신문
  • 입력 2016.10.14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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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국(객원 논설위원, 현대수필로 등단, 수필가)
이여사가 출근해 보니 스마트 폰이 사라졌다.


가방을 뒤지고 주머니를 뒤지고 책상 서랍을 뒤지고 소파 방석을 뒤집어 보아도 없다. 마침내 집으로 전화를 걸어 찾는다. 안방, 건넛방, 침대 위, 밥상 아래, 의자 옆, 거실 구석구석, TV 아래…


…찾았다. 그런데 스마트 폰을 집에서 사무실 까지 가져와야 하는데 어떻게? 분당에서 여주까지. 한시가 급하다. 버스? 대기시간이 너무 길다. 퀵서비스란 게 있던데 그건? 어디 자장면 배달하듯 순식간에 오토바이로 배달해 주는 데 없을까? 이 궁리 저 궁리하다 궁리 끝에 허겁지겁 택시로 배달을 받았다. 왕복요금을 주고.


이것이 2년 전의 일이다. 그 꼴보고


“하루 스마트 폰 없이 살면 살지 그렇게는 못하겠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언제나 스마트 폰이 있어야 한다. 손안에 있던가, 주머니 안에 있어야 있던가, 책상 위에 있던가, 어딘가 내 신체 주변 어딘가 가까운 곳에 있어야 한다. 누군가와 연락을 하던가, 누군가로부터 연락을 받자면 스마트 폰이 있어야 한다. 폰이 아닌 구닥다리 전화는 필요 없다. 스마트 폰에 모든 전화번호가 기기 안에 입력되어 있어 거래처의 사장, 국장, 과장, 대리, 또는 동료, 친구, 아내, 아들 등등 모든 그들의 전화번호를 일일이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전화번호를 일일이 두드려 전화를 거는 사람도 없다. 모두 연락처의 이니셜만 두드리고 통화를 하는 시대다.


전화기의 비효용성을 간파한 사람은 이미 폐기해 버린 지 오래다.


할머니들은 아직도 작고한 남편의 핸드폰을 사용하는 분들도 있다. 그래서 숙모님이 내게 전화를 하면 숙부님이 함자가 액정화면에 떠올라 번연히 작은 어머님의 전화란 걸 알면서도 아 돌아가신 작은 아버님께서 전화라니 하며 언뜻 반갑기도 하지만 순간 서늘한 냉기를 느끼며 “네 작은 아버님”하면 숙모님이 “나야. 나”하고 웃으신다. 그게 작은 어머니 뿐이 아니다. 형님의 핸드폰을 아직도 사용하시는 형수님도 그렇다. 돌아가신 형님의 성함 머리글자를 두드리고 형수님과 타작 날짜를 잡곤 한다. 빨리 연락처 명의를 바꿔 놓던지 해야지. 이 여사는 내가 어찌어찌하다 전화를 못 받는 날이면 바락바락 화를 내고 전화를 안 받는다며 타박이다. 사실이 그렇다. 사업을 하는 놈이 사업장이나 거래처에서 전화가 오면 냉큼냉큼 받아 처리해도 시원찮으며 다른 업체로부터 손님을 빼앗기지 않을 텐데 어느 업체가 나만 믿고 24시간 미루어 주겠는가. 내게 시간을 내어 주는 만큼 그 업체는 다른 업체와의 경쟁에서 그 만큼 밀리고 마는 데 누가 자기 손해 보면서 내가 스마트 폰 소지하지 않은 하루를 눈감아 주겠는가. 더구나 동업자의 전화를 안 받다니. 말도 안 될 소리다. 따라서 스마트 폰의 소지는 필수다. 스마트 폰이 없는 사람은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고 아예 상대조차 해 주지 않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이런 세상에 수시로 스마트 폰을 잊고 다니지를 않나, 스마트 폰을 제때 제때 받지도 않으니 나는 시대에서, 사업장에서 도태되고도 남을 인간이다.


어쩌면 세상은 내가 필요한 게 아닌지도 모른다. 내가 아닌 내가 들고 있는 스마트 폰이 필요한 모양이다. 스마트 폰이 없는 나는 있으나 마나 한 존재? 오로지 스마트 폰을 소지한 내가 필요한 것이니, 나는 필요에 필수적이지만 스마트 폰이 꼭 옵션으로 따라붙어야만 한다. 그렇다면 나는 스마트 폰의 부속품이 아닌지.

스마트 폰은 인간의 눈, 귀, 입, 머리의 일부를 대체하는 사이보그이다. 그런데 실상은 그것이 나의 전부를 대리하고 나는 그것의 껍데기가 되어 그것의 존재를 위하여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따라서 나는 스마트 폰의 사이보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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