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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래의 6.25 참전 수기-잠들면 죽어!-⑳

김성래의 6.25 참전 수기-잠들면 죽어!-⑳

  • 기자명 여주신문
  • 입력 2016.10.04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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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래(대신면 율촌리)
■ 제7장 포병 학교 36기 수료

남아있는 우리들은 졸업식을 했다. 전원 낙오자 없이 육군 소위계급장을 달고 졸업하였다.


임관 날자는 1953년 6월 20일.


육군 소위계급장를 달고 졸업 후 일주일간 휴가를 받아 부대배치 지역을 본인이 직접 찾아 가야한다.
나의 첫 배속 부대는 미 2사단 예하에 창설하는 105mm 야포 제205포병 대대였다. 대대 주둔 지역은 철원 부근이다.


대대에 당도하니 C포대로 발령이 나, 첫 근무지로 C포대 전포대 보조관으로 임명받아 전포대 근무 중, 인근에 9사단이 있다하여 내가 근무하던 30연대 2대대를 찾아가고 싶었다.


포대장에게 부탁하니 차를 한 대 내어주어 2대대 주둔지를 찾아갔다. 대대에 찾아가 같이 근무하던 친구인 2소대 1분대장인 조성철 중사와 작전과에 근무하는 전성분 중사 두 사람 중 작전과 전성분 중사를 찾았다. 다행히 부대에 있어 나를 반갑게 맞아주며 너희들 정말 잘했다.


간성 전투에서 많은 병력을 잃었다. 너희들도 남아 있었더라면 그 전투에서 전사했을 것이다 라고하며, 네가 있던 부대에 가 보면 아는 병사는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 전투로 전사하거나 부상당해 후송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궁금한 7중대 2소대 1분대장 조성철 중사는 어떻게 되었나 하고 물으니 그도 부상당해 후송 되었단다. 아는 이라곤 그와 나. 죽지 말라는 말만 남기고 헤어져 돌아왔다,


우리 대대는 미2사단 포병대 후미를 따르며 직접 전방으로 포신을 놓고 교육을 했는데 당시 휴전직전이라 전방에 전투는 더욱 치열하였다. 우리가 이동하여 진지를 구축한 곳은 내가 먼저 전투한 백마고지후방이다. 여기서 백마고지 쪽으로 포신을 놓고 대대 창설 교육을 하였다.


1953년 7월 28일 휴전 이후 5사단이 공비토벌에서 돌아오자 우리 대대는 바로 춘천 사방거리 5사단 포병으로 예속되었다.


■ 제8장 휴전이 되면서


미국과 소련은 한국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하여 휴전회담을 하고, 우리 국민들은 휴전회담을 반대 하였다. 듣기로 후방에서는 인천 월미도에 모여 휴전반대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최전방에 근무하는 우리들은 휴전을 원했다. 왜 아니 그러하겠나? 매일 죽고 다시 사는 생사의 외줄타기를 하는 전투병의 입장에선 제발 살아서 고향에 가는 것이 최고의 소망이 아니겠는가? 그래도 생각뿐 발설해낼 수 없었다.


드디어 1953년 7월 28일 휴전이 성립되었다.


이젠 살았다. 기뻐도 생각뿐. 전 국민이 반대하는 휴전이므로 기뻐도 어찌 겉으로 들어 내 보일수가 있겠는가.


후일담이지만 2차 대전이 끝나고 미군이 귀향하는 길거리에서 어느 여인을 끌어안고 키스를 퍼 붓는 영화의 한 장면이 무척 부러웠다.


■ 제9장 고사포 대대로 전출하며


당시 후방에서 고사포대대가 창설된다며 대대 당 1명씩 선발 차출하라는 지시가 내려 왔다. 나의 직책은 4과에 보급관이다.


그러나 나는 나의 주특기를 살려 포병으로 가고 싶어 대대장을 찾아가 고사포대대로 보내 달라고 했다. 대대장은 너는 안 된다고 막무가내다. 여러 번 찾아가 조르니 마지못해 보내 주었다.


1955년 6월 나는 육군 포병 중위로 진급했다. 고사포 133대대로 전출되어 찾아가니 김포에서 창설 중이었다. 대대에 들어가니 205포병 대대에서 같이 근무하던 1기 선배 35기 장동명 중위가 와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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