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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래의 6.25 참전 수기-잠들면 죽어!-⑲

김성래의 6.25 참전 수기-잠들면 죽어!-⑲

  • 기자명 여주신문
  • 입력 2016.10.04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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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래(대신면 율촌리)
■제6장 갑종 간부 후보생 합격되어


얼마 후 통보가 왔다. 연대본부에서 시험을 본다하여 우리대대에서 다른 한 사람을 더해 4명이 갔다.


장교가 부러워 간부후보생을 지원한 것이 아니다. 조금이라도 더 살고 싶어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전쟁터가 무섭고 두려워서, 살려면 후방으로 가야하고, 후방으로 가는 방법은 간부 후보생으로 합격하는 것이고, 합격하면 6개월이라는 교육기간이 있어 그동안 전투를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죽음에서 6개월간 보류가 되니까. 그래서 꼭 간부후보생지원을 해야 했다.


시험이라야 신체검사와 운동 몇 가지, 그리고 ‘국군의 맹세’에 대해 묻고…. 이것이 후보생 시험의 다였다. 하기야 그렇다. 그 많은 전쟁경험, 전투경험, 육박전만으로도 장교 후보생이 아니라 장교 할애비가 되고도 남았으리라.


이렇게 간부후보생 시험을 치르고 기대는 걸지도 않았다. 어느 날 통보가 왔다. 칠 있는 동안 내가 있던 전방에서 전투가 치열하여 많은 희생자가 났다는 것을 알았다.


보충대에 많은 후보생 입소자가 모였다. 1952년 12월 30일까지 광주에 있는 보병학교로 입소하기 위해 보충대에 집결한 것이다. 인솔자가 나와 보병학교로 출발. 그곳의 도작해 내무반 편성에 들러 갔다.


우리 기수는 보병 학교 갑종간부 47기생으로 L중대다. 나와 탁 후보생은 같은 중대에 소속 되어 1주일간 교육을 받고 보안대로부터 개인 심사를 받았다. 내용은 군에 입대하기 전, 6·25 사변 발발 전후 본가(本家)에 있을 때, 적에 부역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나는 6·25 당시 적의 내무서에서 경계근무를 하였다고 자수하고 심사를 끝냈다.


그러나 우리 중대 서무계도 같이 갔는데 공산주의자들이 임용한 교사로 채용 되어 근무한 적이 있는데도 이를 자수치 않아 보호소로 이송 입감 되고 말았다.


■ 제7장 포병 학교 36기를 수료 하면서


12주간 보병 기초훈련을 마치고 병과 분리를 하는데 나와 탁 후보생은 보병은 너무 힘들고 위험해 포병 병과를 지원 하였다. 다행히 지원대로 포병 36기 후보생이 되어 포병 학교로 입교하여 교육에 임하였다.


포병이다 보니 수학이 주 과목으로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삼각 함수와 로그함수를 배우자니 알 리가 없다. 이를 배우려고 내무반에 들어서자마자 야간 소등 연장 신청을 하고 수학을 잘 아는 생도에게 낮에 배운 것에 대하여 보충수업을 받았다. 열심히 가르쳐 주었고 열심히 배웠다.


이 야간 보충수업이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는지 모른다. 생소하기만 한 많은 것을 배우며 겨우겨우 따라가게 되었다.


교육 도중 탁 후보생의 삼촌과 나의 형이 면회를 왔다. 구대장을 초청하여 저녁 식사를 하고난 뒤, 우리 둘은 학교로 돌아오면서 면회 온 두 분과 헤어 졌다. 포병학교 생활 11주가 되던 날, 졸업시험을 치르는데, 인원차출이라 하며 10여명의 후보생이 차출되어 졸업도하기 전에 전방으로 전출명령이 났다.


전쟁은 이렇다. 이게 전쟁이다. 졸업식보다 전쟁에서 이기는 일이 더 급하다.


전쟁에서 패한 군인의 졸업식이 뭐 필요하겠는가. 그 때 헤어지면서 떠나는 생도들도 남아 있는 생도들도 울거나 애달파하지 않았다. 전쟁으로 우는 법도 잃어버렸는지 모른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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