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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보스톡의 여름

블라디보스톡의 여름

  • 기자명 여주신문
  • 입력 2016.09.23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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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년섭(객원 논설위원, 저서 목화솜 모정, 고려대학교 졸업)
더위가 한창이던 7월 말 가까운 친지 다섯명이 러시아 블라디보스톡(Vladivostok)에 다녀왔다. 적은 돈으로 안 가본 곳을 다녀오자고 의기투합하여 고른 곳이 블라디보스톡. 150인승 작은 비행기 러시아 오로라 항공 129편에 올라 약 1시간 40분을 비행하니 벌써 러시아 목적지이다. 북한영공을 통과하여 비행하기 때문에 공해를 돌아다니는 대한항공보다는 한 시간 가까이 시간이 줄어든단다.


부옇게 흐린 블라디보스톡 공항에 내리니 25도 정도라던 온도에 어울리게 산뜻하다. 생각보다 다르게 우리나라 시골 공항보다도 시설이 열악한데다가 입국수속이 한 없이 늘어진다. 먼저 내렸던 P가 되 올라와 두리번거리며 우리를 찾는다.


러시아항공은 정원보다도 많은 승객을 예약 받고 선착순으로 탑승수속을 하기 때문에 공항에 일찍 나와야 한다는 안내를 받고 새벽부터 서둘러 약속장소인 인천국제공항 3층 D번 게이트에 모였다. 한 참을 기다려 출국수속을 하려는데 P가 여권을 집에 두고 왔단다. 여권이 없으면 단 한 발짝도 금을 넘을 수 없다는 건 삼척동자도 아는 일. 아쉽지만 P는 집으로 돌아가고, 간사 일을 맡았던 친구가 여행사에 전화를 걸어 사정을 설명하고 못가는 사람의 여행비 환불을 문의 하는데, E번 게이트 뒤편에 외무부 영사민원실이 있으니 빨리 알아보란다. 과연 파견 사무실이 있다. 집에 가려고 1층 버스승강장에 가 있는 P를 불러올려 민원실에 사정을 얘기하니 들어 줄 듯하다.


단체여행인데 한 사람이라도 빠지면 여행에 차질이 생긴다, 여권을 집에 두고 왔다, 등등 여권을 발급해 주기 위한 근거서류와 동행자 항공권을 복사하여 제출하고 직원의 안내로 여권사진을 찍고 수수료 15,000원을 냈다. 여권이 11시에 나온단다. 지금이 10시5분, 늦으면 자리도 없는데 큰일이다 싶어 여행사 수속 창구로 달려가니 이미 수속이 모두 끝나버렸다. 여권이 11시에 나오니 자리를 달라고 떼를 쓰고 매달렸다. 매니저한테 물어 본다고 하더니 비즈니스 석에 자리를 준다고 한다. 돈을 더 올려 받지도 않고 자리가 남았으니 특별히 배래해 준 것이다. 이렇게 저렇게 P도 동행하게 되었다. 비즈니스 석 손님은 출국수속도 특별대우인지 P가 일찍 심사대를 빠져 나갔다가 일행을 놓칠까 두려워 되짚어 온 P에 관한 에피소드이다. 여권 안 챙긴 잘못으로 여러 사람 고생시킨 건 잊어버리고, 비즈니스석에서 아름다운 승무원의 온갖 서비스를 잘 받았노라고 너스레를 떤다.


여행은 재미있어야 한다. 서로 웃고 떠들고 마음이 통해야 한다. 여행은 볼거리가 충분해야 한다. 재미는 이미 P가 제공하였다.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한 시간 거리의 연해주 벌판은 온통 잡초와 잡목으로 채워진 황무지였다. 어쩌면 이렇게 짐승 한 마리, 논 밭 한 뙈기 없이 잡초 밭일까. 가이드의 말로는 추위 때문에 농사를 짓지 않는다고 하는데, 생육기간이 6개월 밖에 안 되어 아예 농사를 짓지 않는다는데 그럼 무얼 먹고 살지?


동해 바다를 끼고, 건너지르며 달려 관광객 스물네 명을 태운 버스가 시내로 들어섰다. 러시아 인구 1억 4천만명중 65만 명이 살아가는 이곳은 생활수준에 맞지 않게 차량이 많고 일부거리의 서 유럽풍 건물을 빼면 조잡하고 길이 좁아 불편할 것 같다는 인상이다. 사람 사는 세상이니 나름대로 어우렁더우렁 적응하며 살아가겠지. 러시아의 국민소득이 14,000불이었는데, 작년부터 7500불로 떨어졌다고 한다. 국민의 생활수준이 짐작된다. 평균수명은 남자 57세, 여자 65세이고 이혼율이 73.5%, 보통 세 번 결혼한다니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남북 9900km, 동서 5500km의 넓은 땅, 그 변두리중의 변두리인 이곳은 좀 낯설다. 그 흔한 약국, 주유소, 은행, 병의원이 눈에 안 띄고(간판이 러시아어여서 못 알아보았나?) 상점다운 상점이 없다. 영어로 된 현대, 삼성간판이 반갑다.


가이드의 말이 우습다. 세 가지 ‘40’이 있는데, 영하 40도 추위는 추위도 아니다. 술 40도는 술도 아니다. 여자나이 40이면 뚱뚱하지 않은 여자가 없다.


처음 맛보는 러시아 만찬이 기다린다. 식사 이름이 ‘뽀르쉬’인데 서비니나 샤슬리(돼지고기 꼬치구이라는 뜻), 샐러드, 퍽레프(냄비뚜껑만한 구운 빵)에 오미자차를 포도주잔에 가득 채우고 서비스로 보드카 한 잔(소주 잔 보다 약간 작다)을 곁들였다. 오미자차에 보드카를 부어 마시니 향이며, 맛이 그윽하다.


명색이 호텔인데 치약, 칫솔, 비누, 면도기도 없고 에어컨이 고장이어서 직원을 부르니 멋쩍게 웃으며, 두 팔로 X자를 그린다.


블라디보스톡은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시·종점인데 9228km의 거리를 우골라야역까지 40분 정도 시승하고, 신한촌(新韓村)에 세워진 세 개의 돌기둥 기념탑에 묵념으로 존경을 표하며 독립을 위한 선조들의 뜨거운 함성을 떠올려 본다. 솔제니첸동상, 연해주 향토박물관, 독수리 전망대에서 시내를 둘러보고, 바닷가에 내려와 흰색 10층 건물(크지는 않다) 극동함대사령부를 마주보며 동서냉전의 주역이었던 소련을 기억한다. 귀국길은 갈 때보다 한결 쉽다.


덩치 큰 러시아 승무원이 나누어 준 어린아이 손바닥만 한 마른 빵 한 조각에 음료수 한 잔을 마시니 벌써 우리나라에 왔다. 짧은 일정을 돌아보며 국민을 위한 우리나라 행정의 발달, 독립투사들이 활동하였던 거친 땅, 고려인들의 슬픈 역사가 묻어 있는 동토(凍土), 밝고 편안한 러시아 백성의 미소를 떠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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