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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이도

인간 이도

  • 기자명 여주신문
  • 입력 2016.07.29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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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성칠(여주시청 홍보팀장)
위인전은 읽기가 쉽지 않다. 어린 학생이면 몰라도 성인이면 더욱 그렇다. 이유는 위인의 성장과정이 너무 상투적이기 때문이다.


위인이 어려움에 부딪쳤을 때 인간적인 고뇌는 없고 자유, 정의, 평등 등의 가치관을 내세우는 까닭이다.
 

어린 사람에게는 이러한 가치관이 형성될 수가 없다. 아무리 선천적인 재능이 있다고 하더라도 발현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보이는 것에서 생각하는 것까지의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더구나 생각하는 것에서 실천하기까지 더 오래 걸리는 것이 인간이다.


인간 이도(세종대왕)에게 큰 영향을 준 여성은 셋으로 좁힐 수 있다. 어머니 원경왕후와 부인 소헌왕후, 맏딸인 정소공주다. 아버지에 의해 어머니와 부인의 남자형제들은 몰살되었고, 특히 부인은 아버지까지 잃고 어머니가 노비로 지내야 하는 고통을 겪었다.


어머니 원경왕후는 2차 왕자의 난 때에는 남편에게 갑옷을 입고 나가라고 할 정도로 과감했다. 또 정세를 정확하게 읽는 시야도 가지고 있었다. 태종이 왕위에 오르는데 일등공신이었지만 남동생들이 숙청되고 태종의 후궁문제로 폐비 지경까지 몰리게 된다.


태종은 문과에 급제했지만 무인 기질이었다. 1차 왕자의 난으로 이복동생들을 제거한다. 왕권강화를 위해 처남들을 사사하고 혁명을 같이 한 이숙번도 내친 인물이었다.


외삼촌 민무회의 말을 충녕으로부터 전해들은 태종은 처갓집을 파국으로 만들었다.


세종대왕의 장인 심온(沈溫)이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로 떠날 때 많은 사람이 모인 것을 상왕인 태종이 듣게 되었다.


좌의정 박은이 심온의 세력이 커짐을 우려한 무고로 강상인의 옥사가 발생하였다. 심온은 의주에서 체포되어 수원에서 처형되었다.


소헌왕후는 이 사건으로 어머니가 관노비가 되는 아픔을 겪었다. 훗날 세종대왕은 여자노비에게 출산휴가를 줌은 물론 더운 여름에 옥에 갇혀 있는 죄수들에게 찬물을 제공하는 등 백성의 인권개선에 주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정소공주는 세종대왕의 맏딸이고 태종의 첫 손녀다. 그녀는 왕실의 귀여움을 받으며 자랐다. 세종대왕은 공주를 매우 사랑하여 업무 중에서 몸소 공주에게 학문을 가르칠 정도였다.


하지만 열 세 살의 나이로 완두창(마마)에 걸려 세상을 떠난다.


세종대왕은 이후 정사를 돌보지 못할 정도로 상심하였다.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는 것은 하늘이 내리는 형벌이라고 생각했다.


이로 인해 세종대왕은 불교에 심취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이도의 삶과 인격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또 생각할 것이 큰 형인 양녕을 제치고 왕세자가 되는 과정이다. 아버지와 형의 불화는 어린 충녕에게 큰 짐이었을 것이다. 세종대왕은 왕위에 있는 동안 형에게 음식과 술을 자주 내렸다. 양녕의 잦은 엽색행각도 처벌하지 않았다. 형에 대한 미안함을 평생 지녔던 것이다.


태종이 생사를 넘나드는 투쟁을 통해 출중한 정치력으로 새 왕조의 골격을 갖췄다면 세종은 초인적인 인내와 노력으로 문치(文治)의 이상을 실천함으로써 왕권강화를 이룬다. 그 인내는 가정의 비극에서 얻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세종대왕은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을 묵묵히 참으면서 상처를 이해하는 단계로 자신을 단련시켰다. 자신의 불행을 보복으로 풀려하지 않고 인간의 허물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성숙한 인간관을 갖는다. 여기서 인간 이도의 깊은 매력을 발견하게 된다.


인간 이도는 아버지와 어머니, 부인, 맏딸의 불행에서 백성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또한 주어진 문제에 대해 심사숙고하면서 서두르지 않고 방법을 모색했다.


그가 어린 시절부터 겪었던 간난신고(艱難辛苦)가 없었더라면 평범한 왕으로 남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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