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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최병덕(58) 여주도예명장

<여주> 최병덕(58) 여주도예명장

  • 기자명 여주신문
  • 입력 2014.11.19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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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도자 뿌리 찾는데 노력할 것”

   
▲ 최병덕 도예명장이 백자백상감박쥐십장생도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최병덕 여주도예명장은 백자 기법으로 한글연적을 비롯해 보물 6호인 고달사지 원종대사 혜진탑비 귀부 및 이수, 독도 등을 정교하게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故 권영묵(홍익대학교 교수 역임) 선생의 사사를 받아 여주만의 특색 있는 도자기를 만들고 있다.
여주신문은 여주의 재료와 혼을 넣어서 온전한 여주의 도자기를 만들어 여주의 자존심을 세우고 싶다는 최병덕 여주도예명장 만나 여주도자에 대해 들어봤다. [편집자주]


젊은 인재 육성은 여주 도자산업에 큰 밑거름


-도자기와 인연을 맺게 된 계기는?

▶나는 1978년 여강고등학교 상과를 졸업 후 은행이나 농협 등 금융권이 아닌 당시 서울역 앞에 있던 우리나라 3대기업인 대우실업에 취업했다. 일반 사무직으로 근무하던 내가 도자기에 입문하게 된 것은, 휴가 때 고향집에 내려왔다가 우연히 들렸던 한 도자기공장에서 도공들이 도자기를 빚는 모습을 보게 되면서부터다. 그때 도자기에 새겨지는 섬세한 조각과 그림들이 나의 마음을 흔들었다. 무언가 가슴을 계속해서 때리는 것처럼 심장 박동이 멈추질 않았고, 격앙된 흥분상태가 계속됐다.
 

학창시절 전국미술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했던 나였기에 처음 접하는 도자기에 대한 감동이 더 컸다. 부모님의 반대가 심했지만, 나는 휴가가 끝나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회사로 돌아가 사직서를 제출했다. 부모님의 반대도 반대였지만 당시 대우실업에서 14만원의 월급을 받던 나는 월급이 6만원으로 줄어 아내에게 항상 미안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도예인이 되겠다는 일념으로 도자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때 여주에서는 유일하게 홍익대학교 미대 출신 도예인이 운영하던 한 도자기 공장에 무작정 취업했다. 그러나 자신만의 장인 정신이 투철한 도예인들은 아무에게나 자신의 노하우를 전승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어깨 너머로 기술을 조금씩 조금씩 익혀나가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2년간 도자기를 공부하다가 원주로 자리를 옮겨 강원도무형문화제 1호인 장송모 선생 아래에서 7년간 도자기를 사사받았다.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도예를 배운 나는 90년 4월 다시 여주로 내려와 고향인 북내면 당우리에 지금의 석담도예를 창업했다. 10년을 배우면 명장이 될 수 있다는 나만의 자만심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많은 부분이 부족하다. 우리나라 최고의 도공이 되기 위해 항상 배우고 노력하겠다.


-명장님만이 추구하는 도자기 작품세계는?

▶도자기는 물레, 유약, 그림, 조각, 가마 등 어느 하나 빼놓을 수 없다. 이 중 한 분야에 전문가가 되도 명장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나는 한 분야만의 명장이 아니라 모든 분야에 명장이 되길 원한다. 그래서 처음부터 끝까지 나의 손길로 작품을 만들고 싶다.
 

특히 ‘ㄱ’에서부터 ‘ㅎ’까지 한글의 자음 모양의 십장생, 사군자, 풍속화 등 다양한 그림이 그려져 있어 연적을 만들고 있다. 여주만의 독특한 무언가를 만들어야겠다는 고민 끝에 큰 임금 세종이 여주에 잠들어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한글연적을 고안했다.
 

또한 일본이 독도문제를 걸고넘어질 때마다 분을 참지 못한 나는 독도에 관한 수많은 사료들과 항공사진들을 분석해 도자기로 아주 정교하게 독도를 만들었으며, 통일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호랑이 모양의 한반도 지도를 도자기로 표현하기도 했다. 여주의 문화재를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고달사지에 있는 보물 6호인 ‘원종대사 혜진탑비 귀부 및 이수’를 만들었다. 여주도자기는 아름답고 품격 있어 우리 여주를 알리기 위해 문화관광을 접목시키고 있다.


   
▲ 물레를 이용해 작품을 만들고 있는 최병덕 도예명장

-앞으로 계획이 있다면?


▶임진왜란 때 포로로 잡혀간 도공과 우리나라를 떠나 일본에 정착한 도공은 일본인들에게 존경을 받고 모두 성공을 했다. 과연 우리나라는 어떤가? 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다. 옛날부터 우리 도공은 평민 중에서도 계급이 가장 아래로 취급돼 핍박을 받아왔다. 임금이 30개를 주문하면 지금의 도지사급인 우참찬이 여기에 30개를 더해 60개를 그 다음은 70개 등 최종적으로 마을 수령이 100개를 주문해 도공들의 삶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일본은 도공에 대한 예의와 존중으로 도자산업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1632년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건국되면서 청하백자의 판로가 막히게 됐다. 이때 일본은 유럽과 무역으로 도자기 수출이 성업을 이룬 반면 우리나라는 쇄국정치로 백성들의 삶은 힘들었다.
 

일본도자기는 유럽에서 큰 인기를 끌면서 도자기 하나와 성을 바꿀 정도였다고 한다. 그 만큼 도공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벌어들인 돈으로 일본은 경제발전으로 군수 물자를 확보해 결국 우리나라를 식민지화 했다. 지금도 우리나라는 우리 도자기의 우수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특히 여주는 천년 도자의 고장이다. 황실도자기 유명한 광주는 1500년대 분원이 설치돼 우리 여주보다 500년이 뒤쳐져 있다. 이천은 1963년대 해강 유근영 선생에 의해 도자기 사업이 발전했다.
 

광주 분원은 개화기인 1884년(고종 21년) 민영화되면서 사실상 해체로 여주 도자기가 각광을 받았다. 하지만 여주 도공들은 후계자를 키우는데 인색해 도자발전에 어려움을 겪었다. 지금 우리 여주도자 발전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뿌리를 찾고 전통과 특섹 있는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 나는 아직 진실 된 여주 흙냄새를 맡아보지 못했다. 여주는 북내 일원에서 질 좋은 백토가 생산됐다는 증거들이 속속 나오고 있어 근원을 찾고 있다.
 

또한 유약의 재료인 규석, 장석, 석회석 등이 함께 생산됐다. 현암동 싸리산 61호 광구는 여주 도자의 파생지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생산된 백토와 고령토는 1990년대 초반까지도 전국 도예인들 사이에서 최고 품질의 도자기 원료로 손꼽혔다.
 

옛날에는 도공들이 여주 고령토를 탐을 내 야밤에 몰래 채굴해가는 일도 빈번하게 일어났다. 나는 뿐만 아니라 우리 여주 도공들의 희망인 여주 흙과 유약재료로 여주만의 작품을 만들 계획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주시가 싸리산 고령토 광맥을 개발해야 한다.
 

이곳은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며 천년의 역사를 이어 오는 여주 도자의 뿌리이며, 천년 여주도자 역사의 산 증표이다. 때문에 선인들의 숨결이 살아 있고 여주도자의 자존심인 싸리산을 잘 가꾸고 보존해 후손에게 물려주는 것이 우리의 역사를 이어갈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곳을 개발해 오랜 전통의 금자탑위에 선배 도공의 열정과 땀으로 빚은 도자기의 우수성을 알리고 여주 도예명장을 비롯한 젊은 여주 도예인들의 자긍심을 높이기 위해서 꼭 필요한 사업이다. 이를 계기로 우리의 뿌리를 찾아 낮은 평가를 받고 있는 여주도자기를 재평가할 수 있는 기회로 만들어야 한다.
 

이를 계기로 젊은 인재들이 외지로 빠져 나가는 것이 아니라 도자기를 배우기 위해 인재들이 여주를 찾게 만들어야 한다. 젊은 인재들이 풍부한 도자사업은 여주 발전의 초석일 뿐만 아니라 문화·예술의 도시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주 도자 발전을 위해 우리 여주 도자기의 뿌리를 찾는데 노력하겠다.



-젊고 참신한 인재 육성을 위해 필요한 정책은?


▶젊은 인재를 육성하기 위해서는 원로 도예인들과 쌍방향으로 교감할 수 있는 기틀이 필요하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술을 나만의 기술이 아니라 젊은 도공들에게 물려줘야 하는 자산이다. 다시 말해서 나만의 기술이 아니라 젊은 인재들의 기술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젊은 인재들이 도예을 배운다면 원하는 노하우를 모두 전수하고 있다. 우리가 10년, 20년에 거쳐 터득한 지식을 후배들에게 전수한다면 이들은 빠른 시간에 기술을 습득하고 지금 보다 더 좋은 작품을 만들어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인정받는 도공이 나올 것이라 믿는다.
 

그러기 위해서 선배들이 전시회를 열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하고 이들이 여주를 대표하는 캐릭터로 부각시켜야 한다. 여주시도 여주출신의 도예인들이 도예와 관련된 대학교에 입학할 경우 학비 지원으로 예술을 알고 학문을 겸비한 인재 육성에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또한 지금은 여주대학교 도예학과가 사라졌지만 이천시처럼 고등학교에 도예과를 설치하는 방안을 지원해주기 바란다. 도예에 재능이 있는 새싹들을 육성하는 것은 여주 도자산업에 큰 밑거름이다. 이를 통해 우리만의 도자 역사를 만들어 가야 한다. 나만의 도자기가 아닌 우리 여주 도자기의 역사를 만들기 위해 젊은 인재들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도예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미래를 보고 조금 먼 곳에 있는 획기적인 발전을 위하여 하나로 뭉치고 적극적인 협력을 통해 지금의 어려운 시기를 극복해 나가길 바란다. 또한 보이지 않더라도 언덕 너머에 있을 발전의 기회는 분명히 우리의 눈앞에 있다고 생각한다. 도공들의 흙사랑은 반드시 열매를 맺을 것이다. 항상 초심을 잃지 말고 배움의 자세로 역사에 대한 자부심과 인성을 겸비한 도예인이 되길 바란다. 

사진/박도금기자 yeoju5@hanmail.net


◆최병덕 도예명장은?
▶1957년 여주출생
▶故 권영묵(홍익대학교 교수 역임) 선생 사사
▶사농 전기중 선생 서예 사사
▶장송모도예연구소(무형문화재 6호) 사사
▶한국 현대미술인협회 공예부문 은상
▶한국문화예술신문사 도예문화 대상
▶여주화인회 창립전
▶일본 동경 한국문화원 명지대학교 동문전
▶여주 반달미술관 초대전
▶석담도예 설립
▶여주도예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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