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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조병호(69) 여주도예명장

<여주> 조병호(69) 여주도예명장

  • 기자명 여주신문
  • 입력 2014.10.22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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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 도자 숨결 살아 있는 역사 만들어 갈 것”

▲ 조병호 명장의 작품인 진사목단문호를 설명하고 있다.

조병호 도예명장은 여주도자기사업협동조합의 창립멤버이며 처음으로 여주도자기축제를 추진한 사람들 중 한사람이다.
제8대 조합 이사장을 지낸 조병호 명장은 1979년 고성도예연구소를 설립하면서 여주에 정착, 여주 도자기 역사와 함께 살아온 여주 도자기의 산 증인이다.
지금도 여주도자산업 발전을 위해 많은 고민을 하고 있는 고성도예 조병호 명장을 만나 여주도자산업 발전 방안과, 여주도자기축제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들어봤다. [편집자주]


"젊은 인재 육성은 여주도자의 밝은 미래"


-도자기와 인연을 맺게 된 계기는?

▶가난이 인연으로 도예에 발을 들렸다. 1960년 보릿고개로 당시에는 한 끼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월급은 둘째 치고 한 끼니를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에 도자기를 배우기 시작했다.
 

옹기공장에서 한 끼의 식사와 몇 푼 안 되는 월급을 받으면서 일을 시작했다. 지금은 고등학교, 대학교, 기술전문학원 등으로 누구나 원하면 내가 배우고 싶은 기술이나 학업을 이어갈 수 있지만 그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초등학교나 중학교를 마치고 어린나이에 기술을 배우기 위해 월급도 없이 설움을 받으며 직장생활을 했다.
 

식사도 밥 한 그릇에 간장에 비벼먹으면서 늦은 시간 까지 일만 해야 했다. 온갖 설움 속에서 기술을 배우기 위해 눈물의 시간을 보내면서 주린 배를 움켜쥐고 내일을 기약했다.
 

지금은 라면 등 먹을 것이 풍부했지만 그 당시에는 월급을 받아 라면을 사먹는다는 것은 사치였을 뿐 배고픔과 설움에 북받쳐 밤새 눈물로 지새웠다. 1966년 당시 동남아 최대 규모를 자랑하던 부산 대한도자기 주식회사에 입사하면서 나의 인생은 새로운 전환점을 맺기 시작 했다.
 

직원이 1200명이 넘는 도자기업 연구실에 입사를 했다. 일용직으로 시작한 일이지만 끼니를 때울 수 있는 임금을 받고 일한 다는 것은 나에겐 행복이었다.
 

4년의 시간이 어떻게 지났는지 모를 정도로 밤을 지새면서 도예일을 배웠다. 이후 수원 동아요업과 광주 선도산업에서 연구실장을 역임하면서 나의 전성기를 맞이하기 시작했다.
 

월급이 폭등하면서 월 35만원의 봉급을 받기 시작했다. 라면 하나에 20원으로 나의 월급은 지금으로 환산하면 수백만원의 가치로 높아 저축이 가능했다. 그동안 모은 돈으로 1979년 여주에 정착, 현 고성도예연구소를 설립했다.
 

그 때부터 인연을 맺기 시작해 초지일관으로 나의 사업 발전이 도예부분에 새로운 전환점이 됐다. 어려운 시절 고픈 배를 움켜쥐고 설움 속에서 배운 기술을 버리지 않고 초지일관 한 길을 걸어온 것이 지금 이 자리에 나를 있게 한 것이라 생각한다.


-여주도자기축제를 처음 시작하게 된 계기와 에피소드는?

▶어느 덧 도자기축제가 올해는 26년째를 맞이하고 있다. 처음 도자기 축제를 시작할 때 장소도 없어 포장도 안 되고 열악한 예 도자기조합 자리인 천송동에서 시작을 했다.
 

일본 아리따이해 방문을 계기로 여주도자축제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이곳 저곳에 도예인들과 함께 자문을 구하면서 첫 축제를 열게됐다. 당시 야시장을 열고 지역 주민들을 끌어 모아 시작한 축제는 지금과 비교할 수 없지만 도예인들의 얼굴에는 기쁨이 가득했다.
 

도예인들이 십시일반 축제 비용을 모아 경험도 없이 시작해 성공적으로 축제를 치렀다는 것에 자부심과 자신감을 얻었다. 이후 6회까지 자력으로 축제를 치르면서 여주 도자사업에 한 획을 그었다.
 

제7회부터는 박용국 전 군수의 지원을 받아 더 큰 축제로 발전시켰다. 도자기축제가 여주시 전체의 축제로 치러지기 위해서는 도예인 뿐만 아니라 여주시, 경찰서, 소방서, 사회단체, 자원봉사자, 예술인 등 여주시의 사회구성원 모두가 추진위원회에 참여해야 한다.
 

추진위원회 내에 교통, 공연, 의료, 소방, 자원봉사 등 각 분야의 분과위원회를 만들고 각 업무에 전문성을 지닌 기관·단체가 분과위원장을 맡으면 더 높은 참여의식과 소속감으로 해당 업무에 대한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여주군 사회구성원 모두가 축제에 참여하기 때문에, 보다 많은 군민들의 관심을 모을 수 있고, 축제가 온전한 여주시의 잔치로 치러질 수 있다. 그 대신 도자산업을 위한 축제이니 만큼 나를 비롯한 모든 도예인들은 추진위원회에 참여를 하던 안하던 뒤에서 최선을 다해 뒷바라지를 해야 한다. 언젠가 지역의 한 예술인이 처음에는 지역 도자기축제 추진위원회에 함께 참여해 내일처럼 즐겁게 축제를 준비했었는데, 언제부턴가 그렇지 못한 것 같아 아쉽다.
 

현재 도자기축제는 추진위원회와 여주시라는 두마리의 말이 몰고 있는 쌍두마차와 같다. 쌍두마차는 두 마리의 말이 호흡을 맞춰 나아간다면 훨씬 더 강한 추진력을 발휘할 수 있지만 어느 한 마리가 앞서 나간다면, 금방 뒤집어지고 만다. 도자기 축제가 조금은 느리지만 한해한해 축제 노하우를 쌓아가면서 차근차근 전진하려면 실무자가 자주 바뀌는 여주시보다는 추진위원회에 많은 힘을 실어줘야 한다.
 

조금은 미숙하더라도 보다 오래 현장에 남아 있는 도예인들과 추진위원회가 모든 책임을 지고 주도적으로 축제를 준비한다면, 해를 거듭할수록 시행착오로 인한 노하우가 축적돼 나중에는 대한민국에서 제일가는 축제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여주도자기사업협동조합 창립 멤버로 문제점과 개선해야할 점은?

▶지금의 도예인들은 과거 30대 초반의 젊은 혈기로 왕성한 활동을 하면서 여주 도자 사업을 이끌어 왔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지금은 원로가 됐지만 여주도자기사업협동조합과 협력이 필요하다. 또한 선의의 경쟁을 통해 여주도자 사업 발전에 밑거름이 돼 공동체로 인정을 받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 자아비판을 통해 반성을 하고 조합원과 비조합원들이 함께 손을 잡고 우리라는 울타리에서 문제점에 대안을 제시하고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야 하다.


▲ 여주 도자사업의 산증인으로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는 조병호 명장

-여주의 도자기 사업의 어려움은?

▶많은 젊은 도예인들이 여주도예명장이 돼 여주도예가 젊어지고 활기를 불어 넣는 촉매제 역할이 필요하다. 지금은 5명의 명장이 있지만 큰일을 하기에 부족한 부분이 많다. 여주시는 매년 1명의 명장을 선정하고 있어 도예인들이 적극적인 응모를 통해 명장을 존중하고 인정하는 분위기가 필요하다.
 

여주시는 행정적인 지원을 통해 명장의 가치를 높여 외지인들에게 지역을 홍보하고 여주도자에 지명도를 높여야 한다. 후배들은 명장을 밀어주고 명장들은 후배들을 이끄는 협력을 통해 여주 천년 도자의 숨결을 이어가야 한다.
 

우리는 재산이 없어도 여주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도자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다는 것을 잊지말아야 한다. 서로가 이런 자부심을 갖고 장인 정신으로 여주도자의 가치를 높인다면 여주도자가 한단계 업그레이드되고 천년 도자의 숨결이 살아 숨 쉴 수 있다. 도예인의 한사람으로서 현실에 대해 가슴이 아프지만 젊은 인재들이 여주 도자에 희망을 불어 넣고 있어 미래는 밝다고 본다.


-여주도자만의 특색을 살리기 위한 방안은?

▶이천 도자기가 지명을 높일 수 있었던 것은 원로 도예인들이 끝까지 도예를 만들고 해외 전시 판매로 인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많은 문하생들을 배출해 참신한 작품들이 만들어져 대한민국 명장이 될 수 있었다.
 

우리 여주는 원로 도예인들이 일찍 은퇴하면서 도예기술의 명맥이 끊기고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여주도자기사업협동조합을 중심으로 여주시와 함께 전문적인 용역을 조사해 문제점을 진단해 방안 모색이 필요하다.
 

여주 도자가 한 단계 도약을 위해 역사적 배경을 재발견해 뿌리를 찾아야 한다.
 

최근까지 도자기 원료를 채굴하던 싸리산, 여주백자의 발상지인 북내면 맹골, 질 좋은 점토로 신석기 시대부터 도기 문화의 중심이 됐던 점동면 등 우리에게 풍부한 역사적 배경이 있다.
 

또한 40대 이하의 젊은 도예인이 많아 여주의 전망이 밝다. 이들이 여주를 대표하고 전 세계 명장이 되도록 원로 도예인들이 이끌며 여주 도자역사를 발굴해야 할 것이다.


-도예인을 위해 하고 싶은 말은?

▶각자 자신의 길을 끊임없이 개척해 나가야만 자신은 물론이고 여주도예업계 전체가 발전할 수 있다. 도예인들이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이 남이 잘된다고 해서 그것을 따라가는 일이다. 모방은 곧 공멸을 의미한다. 나이가 적든 많든 경력이 짧든 길든 먼저 경험해 본 사람에게 물어보면 그 안에서 새로운 해답을 찾아낼 수 있다. 그리고 자화자찬이 아닌 겸손함과 자기 일에 용기를 갖기 바란다. 

사진/박도금기자 yeoju5@hanmail.net

◆조병호 도예명장은?
▶1946년 출생
▶제8대 여주도자기사업협동조합 이사장
▶1989년 경기도 공예품경진대회 입선
▶2001년 대통령표창
▶2005년 경기도으뜸이 지정
▶2006년 제1대 여주도예명장 지정
▶현 고성도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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