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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여주인물을 소개합니다

역사속 여주인물을 소개합니다

  • 기자명 여주신문
  • 입력 2014.04.11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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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근 - 63

▲ 조성문(여주문화원 사무국장)
1800년 정조(正祖)가 승하하고 순조(純祖)가 즉위하면서 여주사람 김한구(金漢 )의 딸인 영조(英祖)계비 정순왕후(貞純王后)의 주도로 시작된 천주교 박해는 이후 50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1849년 헌종(憲宗)이 승하하고 철종(哲宗)이 즉위하자 김조순(金祖淳)의 딸인 순원왕후(純元王后)가 섭정을 맡게 되었다. 순원왕후는 철종이 즉위한 다음날인 1849년 7월12일 신유교난(辛酉敎難)때 목숨을 잃은 철종의 조부모의 죄를 씻어주고 1856년 4월에는 조선천주교회 창설자인 이승훈(李承薰)의 죄까지 씻어 주었다. 그리고 1862년 7월 기해교난(己亥敎難)때 외방선교회 앵베르 범주교(范主敎)의 소재를 밀고한 배교자 김순성(金順性)이 왕족 이하전(李夏銓)을 임금으로 삼으려는 음모를 꾀하였다 하여 그를 잡아들이고는 대역무도죄로 그 일당과 함께 효수하였다. 철종을 대신하여 정사를 맡아보던 순원왕후는 1851년 9월 김문근의 딸을 왕비로 삼은 후 그해 12월에 세도를 김문근에게 넘겨주고 물러나 앉았으나 1857년 6월4일 승하할 때까지 은연중 천주교를 감싸주는 일에 힘썼다. 또한 김문근도 천주교에 대해 관대한 정책을 펴 철종재위 중에는 박해가 거의 없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미 순교한 교우들의 억울한 죄명을 씻어 주기도 하였다.
 

김문근(金汶根 1801-1863)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노부(魯夫). 김인순(金麟淳)의 아들로 김이순(金 淳)에게 입양되었다. 1841년 음직으로 가감역이 된 뒤 현감을 지내다가 1851년 딸이 왕비가 되자 영은부원군(永恩府院君)에 봉작되었고 영돈녕부사가 되었다. 이후 12년간 왕궁을 지키는 금위대장을 비롯하여 요직을 지내면서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를 강화시켰다. 김문근의 등장과 함께 김흥근(金興根), 김좌근(金左根)등이 잇달아 영의정이 되었고 김수근(金洙根), 김보근(金輔根), 김영근(金泳根), 김응근(金應根), 김교근(金敎根)등이 판서직을 돌아가며 맡았으며 특히 김좌근이 이른바 세도재상의 자리에 앉은 후에는 그 양자 김병기(金炳冀)를 중심으로 하는 병(炳)자 돌림이 대를 이어 모든 요직을 완전히 독점했다. 철종시대에는 안동 김씨의 권력이 절정에 달해서 그들에게 위협이 될만한 사람이 있으면 미리 처단하기를 서슴치 않았다.
 

1860년 대사헌 서대순(徐戴淳)이 상소하여 철종 사후 왕위계승이 가장 유력시 되던 경평군(慶平君) 호가 김문근과 김좌근을 비난하고 있으니 처벌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안동 김씨의 서슬에 눌린 철종은 경평군을 전라도 강진(康津)으로 유배보내고 한편으로 종정부에 명하여 속적을 끊어 경평군의 작호를 환수하였다. 1862년에도 기개있던 왕족으로 왕위계승의 물망에 오르던 20세의 이하전(李夏銓)이 역모로 몰려 죽은 사건도 그 대표적인 예에 하나다. 이처럼 정치권력으로부터의 철저한 왕권배제, 안동 김씨로 집중되는 절대권력, 토호·아전등 봉건적 세력에 대한 비호와 결탁, 그 결과로서 백성들에 대한 수탈의 심화는 세도정치의 속성이며 또한 그 유지책이기도 했지만 이는 결국 세도정권 자체를 붕괴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야 말았다.
 

1863년 11월6일 김문근이 죽었다. 철종은 자신이 죽기 1개월 전에 맞이한 장인의 죽음에 매우 애통해 하였다. “돈후한 자질은 세상에 모범이 될 만하였고 원대한 식견은 여러 사람을 주재할 만 하였다. 그리고 충애스런 성품과 의리를 굳게 지키는 확고함은 곧 이 집안의 가법인 것이다. ‘근신검약(謹愼儉約)’ 네글자로 우리 자훈(慈訓)을 받들어 주야로 10여년을 하루처럼 복응하여 왔다. … 병환이 위독해 질 때 급박한 상황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어찌 오늘 졸서했다는 단자가 갑자기 이를 줄이야 생각이나 했겠는가? 너무도 슬픈 나머지 마음을 가눌 수가 없는 지경이다.…” 김문근은 몸이 비대하여 포물부원군(包物府院君)이라고 불리곤 했는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세필(細筆)에 능했다고 한다. 묘는 대신면 초현리(草峴里)에 있다. 시호는 충순(忠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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