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조순(金祖淳 1765-1832) 본관은 안동(安東). 초명은 낙순(洛淳). 자는 사원(士源). 호는 풍고(楓皐). 순조의 장인으로 영의정 김창집(金昌集)의 4대손이며 아버지는 부사 김이중(金履中)이다. 1785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이 되었고 초계문신(抄啓文臣)에 뽑혔다. 1792년 동지사겸 사은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이조참의, 직각을 거쳐 1800년 보덕에 제수되었다.
같은 해 6월 정조가 승하하기 직전 세자에게 “지금 내가 이 신하에게 너를 부탁하노니 이 신하는 반드시 비도(非道)로 너를 보좌하지 않을 것이다. 너는 그렇게 알라.” 라고 한 유명(遺命)에 따라 순조 즉위후 국정을 총괄하였다. 김조순이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갈 때의 일이다. 그가 1787년 예문관에 근무하면서 당송(唐宋)시대의 패관소설(稗官小說)들을 읽으며 한가로이 지내다가 정조에게 적발되어 단단히 혼이 났던 사건이 다시 불거져 나왔다. 이에 김조순이 스스로의 잘못을 반성한 함사(緘辭)와 시문(詩文)을 지어올렸는데 이것이 임금의 심금을 울렸다. “누군들 허물이 없겠는가마는 고치는 것이 중요하다. 대체로 학자들이 자품이 높다보면 멀리 있는 것에 마음이 치닫고 재주가 있다보면 밖으로 내닫는 법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름을 알고서 고치기를 꺼리지 않고 다시 범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이 함답을 보니 문체가 바르고 우아하고 뜻이 풍부하여 무한한 함축미가 있음을 깨닫겠다. 촛불을 밝히고 읽고 또 읽고 밤 깊은 줄도 모르게 무릎을 치곤 하였다.… 지어 올린 시와 문을 보니 문은 사람이 늘상 먹는 곡식같고 시는 비단이나 자개같았다.…” 순조즉위 후 김조순은 병조판서, 이조판서 등 여러 요직에 제수되었으나 항상 조심하는 태도로 사양하였다. 딸이 순조의 비가 되자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에 봉해지고 훈련대장, 호위대장등을 역임하였다.
1832년 4월 김조순이 죽자 순조는 애통해 하며 성복(成服)하는 날에 망곡(望哭)을 하고 손수 제문을 지었다. 사관들의 평가도 후했다. “김조순은 용의(容儀)가 뛰어나게 아름답고 기국(器局)과 식견이 넓고 통달하여 어릴 때부터 세속밖에 뛰어났으며 젊어서 과거에 급제하고는 공평하고 정직하여 숨김이 없음으로써 정묘(正廟)의 깊이 알아줌을 받아 뒷날 어린 왕을 보좌하는 책임을 맡았다. 안으로 국가의 기밀업무를 돕고 밖으로는 백관들을 총찰하여 충성을 다하면서 한 몸에 국가의 안위를 책임졌던 것이 30여년이었는데 오직 성궁(聖躬)을 보호하고 군덕(君德)을 성취하며 정의(精義)를 굳게 지키고 선류(善類)를 북돋아 보호하는 일로써 보답하는 방도를 삼았기에 우리 태평성대의 다스림을 돈독히 도울 수 있었다.” 김조순이 죽은 지 1년이 되자 “황려(黃驪; 여주)는 충문공의 장구와 의관을 간직한 곳이니 사당을 세워달라.”는 관학유생들과 지역선비들의 상소가 있었다. 임금이 곧 원액(院額)을 내려주었는데 현암(玄巖)이라 하였다. 김조순의 묘는 처음 흥천면 효지리(孝池里)에 썼다가 1841년에 이천 부발(夫鉢)로 옮겼다. 시호는 충문(忠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