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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여주인물을 소개합니다

역사속 여주인물을 소개합니다

  • 기자명 여주신문
  • 입력 2014.03.14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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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노춘 - 60

▲ 조성문(여주문화원 사무국장)
정조(正祖)임금이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신하가 채제공(蔡濟恭)이다. 1784년 6월6일 놀랍게도 채제공을 탄핵하는 상소가 올라왔다. “채제공의 죄는 어찌 다 주토(誅討)하겠습니까? 연전에 삼사(三司)의 상소에서 이미 그의 단안이 이루어졌습니다. 임인년 정월 조참(朝參)때 대신의 연주(筵奏)가 나왔는데 이 적(賊)의 역절(逆節)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애석하게도 대신의 전후 두말이 판연하게 두 갈래를 이루어 장토가 이로 말미암아서 무산되었던 것입니다. 아! 저 대신은 비록 말하기에 부족하지만 어찌 공의(公議)를 그 한사람 때문에 무너지게 하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건단(乾斷)을 내리시어 율에 의해 처단하소서.…” 이 상소의 주인공이 이노춘이다.
 

이노춘(李魯春 1752- ?)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군정(君正). 여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동지돈녕사 이용모(李龍模)이고 어머니는 윤동석(尹東奭)의 딸이다.
 

1779년 유생강제(儒生講製)에서 제술(製述)로 수석을 차지하여 곧바로 전시(殿試)에 응할 수 있는 자격을 얻어 1780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삼사와 이조의 청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784년 응교로 있을 때 채제공을 탄핵하였으나 오히려 임금의 노여움을 사 평북 운산군(雲山郡)으로 귀양을 갔다가 그해 8월2일 문효세자(文孝世子)의 책봉식으로 인해 대사령(大赦令)이 반포되어 석방되었다.
 

이노춘은 원래 글재주가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가 제술시험에서 1등을 하자 정조가 하교하기를 “그대의 대책(對策)은 글 뜻이 상세하고도 분명하니 반드시 이기(理氣)와 성명(性命)의 논설에 대해 어둡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한번 급제했다는 것으로 스스로 만족하게 여기지 말고 더욱더 힘쓰라”하였고 초계문신(抄啓文臣)의 과시(課試)에서 “이시수(李時秀)는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의 후손이고 이노춘은 택당(澤堂) 이식(李植)의 후손이다. 그런데 택당의 연광정시(練光亭詩)를 집어 내 출제하였을 적에는 이노춘이 으뜸을 차지하였고 월사의 망해정시(望海亭詩)를 출제했을 적에는 이시수가 으뜸을 차지하였으니 또한 우연한 일이 아니다.”라고 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이 글재주가 그를 파멸로 이끌었다. 귀양에서 풀려난 이노춘이 다시 상소하기를 “신이 지난 번에 올린 차자의 글 가운데 대신에게 의율(擬律)하라고 한 조항은 매우 광망한 짓이었습니다. 신은 그때 대간이 올린 글의 원본을 보지 못하고 단지 시의(時議)가 준열하였기 때문에 급작스럽고 당황한 나머지 말을 가리지 않은 채 발론하였던 것이니 이것이 어찌 신의 본심이었겠습니까? … 그러나 신이 애석하게 생각하는 것은 지금 시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온 세상을 침묵시키고,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을 사적으로 처단하며, 수군거리면서 등을 돌리는 것이 마침내 그 기량(伎倆)을 이루었습니다.
 

만일 처신이 깨끗하고 세상 격식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 경우에는 기필코 어떤 일로 인하여 복잡한 기회가 되면 헤아리기 어려운 함정에 몰아 넣음으로써 순식간에 생사가 갈리게 하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전의 상소가 이미 본심이 아니라면 이번의 상소는 과연 본심에서 나왔겠는가? 전후의 연석(筵席)에서 그가 엉뚱하고 주견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의 수단이 좌우로 엎치락 뒤치락하고 태도가 아침 저녁으로 변환하는 것이 이처럼 거리낌이 없을 줄은 미처 헤아리지 못하였다”며 불쾌함을 감추지 않았다. 사도세자(思悼世子)를 높이는 것으로 대표되는 정조의 정책에 동조하는 인물들을 배격하는 상소가 정조에게 달가울 리 없었다.
 

이노춘의 상소는 시파(時派)와 벽파(僻派)의 분립에 중요한 계기로 작용한다. 이 일로 이노춘은 흑산도(黑山島)에 위리안치 되었다가 13년만에야 풀려났다. 이후 이조참의를 거쳐 순조즉위 후 강원도관찰사, 대사성, 대사간, 예조참판 등을 지냈으나 1806년 김조순(金祖淳)을 중심으로 하는 시파에 의해 벽파가 축출될 때 거제도(巨濟島)에 유배되었다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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