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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여주인물을 소개합니다

역사속 여주인물을 소개합니다

  • 기자명 여주신문
  • 입력 2014.03.07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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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대 - 59

▲ 조성문(여주문화원 사무국장)
창녕(昌寧) 조씨(曺氏)는 한때 성을 두획인 조(曹)로 썼었다. 창녕조씨 시조가 탄생할 때 겨드랑이에 조자(曺字)무늬가 있어 신라 진평왕(眞平王)이 조(曺)자로 성을 내린 이래 한획을 따랐는데 조한영(曺漢英; 창녕 조씨 통고문에는 조문수로 되어있음)이 운서를 쫓아 두획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1800년 4월13일 정조(正祖)가 조윤대를 도승지로 임명하면서 교지에 한획을 쓰도록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윤대(曺允大 1748-1813)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사원(士元). 호는 동포(東浦). 대사간 조하망(曺夏望)의 손자로 여주에서 태어났다. 1779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을 지낸 뒤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 뽑혔다. 이후 이조전랑, 대사성, 대사간, 대사헌, 이조참판을 거쳐 1801년 형조판서가 되었다. 조윤대는 이해 동지겸진주사(冬至兼陳奏使)의 정사로 청나라에 가서 신유사옥(辛酉邪獄)때 처형된 중국인 주문모(周文謨)신부에 대한 사정을 전하고 돌아왔다.
 

주 신부는 우리나라에 파견된 최초의 선교신부로서 중국 소주(蘇州)출신이었다. 1794년 압록강을 건너온 주신부는 6년간 숨어지내며 포교활동을 했다. 그러다 자신 때문에 많은 신자들이 고통당하고 있음을 알고는 의금부에 자수하여 1801년 새남터에서 49세로 순교하였다. 비록 사학죄인(邪學罪人)이었다고는 하나 주 신부를 처형한 것은 외교적 마찰을 일으킬 수 있는 민감한 문제였다. 어린 순조(純祖)임금을 대신하여 수렴청정을 하고 있던 대왕대비 김씨와 진주정사 조윤대의 대화 속에서 이를 엿볼 수 있다.
 

“대왕대비가 하교하기를 ‘금번에 진주(陳奏)할 일은 주문(奏文)속에 상세히 담겨져 있으나 들어간 뒤에 황상(皇上)이나 예부(禮部)에서 혹시 캐어묻는 일이 있게 되면 세사신(조윤대, 서미수, 이기헌)이 미리 서로 강확(講確)하여 잘 말을 해서 대답하도록 하라.
 

또 혹시 뜻밖에 탈을 잡아서 묻는 일이 있게 되면 사세(事勢)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던 뜻으로써 사리에 의거하여 대답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저들이 만일 변금(邊禁)이 엄하지 못하여 죄책이 변신(邊臣)에 있다하면서 대국(大國)의 사람이 혹시 주륙(誅戮)을 당하였다고 한다면 그 소국(小國)의 도리에 있어서 대단히 불리하다. 이러한 경우에 도달하게 되면 갈등이 생기기 쉬우니 반드시 자세한 곡절을 잘 말해서 대국사람의 마음을 언짢게 하지 마는 것이 옳을 것이다’하니 조윤대가 말하기를 ‘주문모의 일에 대하여는 처음에 동국(東國; 조선을 가리킴)의 사람으로 알고 죽였는데 지금에 와서 황사영(黃嗣永)의 초사에 소주사람이라고 이르기 때문에 진주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면 말이 정당하고 사리에 맞을 것입니다’ 하였다” 주문모 신부는 5월에 죽었고 이때 조선에서는 그가 중국사람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어찌되었건 10월에 청나라로 들어간 조윤대 일행은 이듬해 4월, 무사히 일을 마치고 귀국했다.
 

조윤대는 병조판서, 이조판서 등 중앙의 요직을 두루 거친 후 1811년 동지사가 되어 다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두 차례에 걸쳐 한성판윤이 되었다가 판돈녕부사로 벼슬을 마감했다. 정조가 승하하던 날, 조윤대의 행적이 실록에 남아있다. 1800년 6월 초순부터 발병한 부스럼병이 종기로 번져 정조의 병세가 악화되고 있었다. 그간 여러 약을 썼지만 효과가 없었다. 자신의 병이 가슴의 홧병에서 유래하였다며 신하들을 향해 불만을 토로하던 정조는 6월28일 오전, 혼수상태에 빠져들었다.
 

왕대비가 “이번 주상의 병세는 선조(先朝; 영조를 가리킴) 병술년의 증세와 비슷하오. 그 당시에 드셨던 탕약을 자세히 상고하여 써야 할 것이나 그때 성향정기산(星香正氣散)을 복용하고 효과를 보았으니 의관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올려드리게 하시오”하자 도제조 이시수(李時秀)가 의관과 의논하여 그리 정하였다. 이어 부제조 조윤대가 성향정기산을 받들고 들어왔으나 두세 숟갈을 넘기지 못하고 임금은 오후 6시경에 승하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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