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최종편집:2024-03-28 11:17 (목)
실시간

본문영역

역사속 여주인물을 소개합니다

역사속 여주인물을 소개합니다

  • 기자명 여주신문
  • 입력 2014.02.28 14:27
  • 0
  • 본문 글씨 키우기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민경혁 - 58

▲ 조성문(여주문화원 사무국장)
여주시 하거동(下巨洞) 여흥민씨 묘역에 있던 상석과 문인석들에 대한 도난 미수사건이 발생했던 일이있었다. 묘표가 서 있지 않아 무덤의 주인을 확인 할 수 없었으나 여흥민씨 족보(삼방파보)를 통해 민경혁의 아버지 민백징(閔百徵)과 할아버지 민안수(閔安洙)의 묘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사건의 와중에서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흥선대원군의 외할아버지인 민경혁의 묘가 발견되었다.
 

민경혁의 가계는 광훈(光勳)-정중(鼎重)-진장(鎭長)-안수(安洙)-백징(百徵)-경혁(景爀)으로 이어지는데 민경혁은 오촌당숙인 백징의 양자로 들어갔으며 생부(生父)는 백헌(百憲)이고 생조부(生祖父)는 덕수(德洙)이다.
 

민경혁(閔景爀 1746-1815)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여행(汝行). 호는 운소(雲巢). 종9품인 선공감(繕工監) 가감역관(假監役官)에 제수되었으나 출사하지는 않았다. 민경혁의 3남4녀중 막내딸이 남연군(南延君) 이구(李球)와 결혼해서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을 낳았다.
 

조선시대에는 추증(追贈)이라 하여 본인이 죽은 뒤에 벼슬을 주는 일종의 명예직 제도가 있었다. 추증의 기준은 종친과 문무관으로서 2품 벼슬을 지낸 자는 위로 3대를 추증하되 그 부모는 본인의 품계에 준하고 조부모는 1품을 낮추고 증조부모는 다시 1품을 낮추어서 증직하였다. 1863년 12월13일. 흥선대원군의 둘째아들 명복(命福)이 즉위하니 이이가 조선 26대 임금 고종(高宗)이다. 고종의 즉위와 더불어 실권을 쥐게 된 대원군은 자신의 외가(外家)에 대한 대대적인 증직을 실시하는데 경혁에게 우의정, 백징에게 좌찬성, 안수에게 이조판서, 백헌에게 이조참판, 덕수에게 이조참의의 벼슬을 내렸다. 대원군은 죽은 사람 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여흥민씨들에게도 파격적인 벼슬을 내렸다.
 

몇가지 예를 들어보면 처남 민승호(閔升鎬)- 이조참의-호조참판-형조판서-병조판서. 민규호(閔奎鎬) -이조참의-형조참판-이조판서. 처남 민겸호(閔謙鎬) -이조참의-대사성-형조참판. 민태호(閔台鎬) -황해도 관찰사. 장인 민치구(閔致久) -공조판서. 민치상(閔致庠) -형조판서-예조판서-공조판서-형조판서 등이다.
 

안동 김씨의 위세에 눌려 굴욕의 세월을 보내야 했던 대원군이 조대비와 연합하여 아들을 임금으로 만들고 자신은 섭정의 지위에 올랐으나 안동 김씨 60년, 풍양 조씨 30년의 세도정치 기반이 워낙 탄탄하였기에 마음대로 정권을 좌지우지 할 수 없었다. 똑똑한 왕족은 철저하게 배제되어 모함을 받고 귀양을 가거나 죽음을 당했으므로 의지할 바가 못되었다. 그러므로 외가이기도 하고 처가이기도 한 여흥 민씨 쪽에 기울어 진 것은 대원권의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대원군 통치 10동안 명성황후가 아니라 대원군 스스로의 계획에 의해 여흥민씨들이 정계에 진출하였다는 점이다. 정권을 담당하게 된 여흥민씨들은 중국의 아편전쟁, 미국의 남북전쟁, 일본의 명치유신등 급박하게 돌아가는 주변 국제정세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대원군의 쇄국정책보다는 개방정책이 필요함을 깨닫게 되었고 마침 고종의 친정(親政)을 계기로 대원군이 물러나자 그의 빈자리에 명성황후를 등장시키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 명성황후를 중심으로 한 개방정책은 명성황후에 대한 암살기도와 민승호의 암살을 시작으로 수구(壬午軍亂)와 개혁(甲申政變)의 소용돌이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다가 1894년 갑오농민전쟁, 1895년 명성황후의 시해로 중단되면서 조선의 멸망으로 치닫고 말았다.
 

영전유궐(嬴顚劉蹶)이란 말이 있다. 영(嬴)씨의 진(秦)나라도 망하고 유(劉)씨의 한(漢)나라도 결국 망했다는 말로 권력의 무상함을 뜻한다. 권력의 정점에서 천하를 호령하던 대원군이 자신의 외조부를 우의정으로, 두분의 외할머니를 정경부인으로 증직시키며 묘를 호화롭게 꾸미고 친필 비석까지 세운 지 불과 150여년이 지난 오늘, 돌보는 이 없이 봉분 위엔 나무와 잡풀만이 무성하니 정말 권력이 무상할 따름이다.

 

저작권자 © 여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기사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