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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여주인물을 소개합니다

역사속 여주인물을 소개합니다

  • 기자명 여주신문
  • 입력 2014.01.24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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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윤지당 - 54

▲ 조성문(여주문화원 사무국장)
조선시대에 부녀자들이 교육을 받고 학문을 닦는다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이런 통념의 틀을 깨고 남자와 여자의 존재를 음양의 우주질서와 같이 상호보완적인 것으로 인식하여 여자도 남자와 마찬가지로 우주와 사회에서 똑같이 중요한 필수적 구성원임을 갈파한 여인이 있었다.
 

그녀가 2백5십여 년 전에 여주에서 살다가 원주로 시집간 임윤지당이다.
 

임윤지당(任允摯堂 1721-1793) 본관은 풍천(豊川), 아버지는 함흥판관을 지낸 임적(任適)이며 어머니는 이조판서로 증직된 윤부(尹扶)의 딸이다. 부친이 양성현감으로 부임하던 해에 태어났다. 8세때 아버지를 여의고 9세 되던 해 청주근처 옥화(玉華)라는 곳으로 이사하였다. 17세때 조상들의 선영이 있던 여주에 와서 살다가 19세때 원주의 선비 신광유(申光裕)에게 시집갔다. 28세때 청상과부가 된 윤지당은 생가와 양가의 두 시어머니를 모시면서 효성을 다하고 가정을 화목하게 이끌어 주위의 칭송을 받았다. 결혼 후 난산 끝에 아이를 하나 낳았으나 어려서 죽었고 그 후에는 자식을 갖지 못하였다.
 

동생 운호(雲湖) 임정주(任靖周)가 기록하기를 “나이 열한 살 때 청주 옥화에서 여주로 이사가 살게 되었다. 여주는 번화한 곳이어서 친구들이 밀고 당겨 나도 모르게 방자하게 되었다. 누님이 조용히 타이르시기를 ‘왜 방심한 마음을 거두지 아니하고 남들을 따라 다니면서 두레박처럼 오르락 내리락 놀기만 하느냐?’ 하셨다. 내가 이 말씀을 듣고 깊이 뉘우치고 곧 마음을 바로 잡았다. 누님께서는 순순히 가르치시고 타이르는 성의가 간절하셔서 사람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셨다. 내가 지금까지 큰 죄를 면하게 된 것은 실상 우리 누님께서 그때 깨우쳐 주신 덕분이다” 하였다.
 

윤지당의 둘째 오빠로 성천부사를 지낸 성리학자 녹문(鹿門) 임성주(任聖周)는 도암(陶庵) 이재(李縡)에게서 수학하면서 10살 아래인 윤지당을 가르쳤다. 윤지당은 오빠로부터 효경, 열녀전, 소학, 사서 등을 배웠고 5남 2녀였던 형제들과 경전, 사서 등을 강론하였는데 식견이 탁월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낮에는 부녀자의 일에 진력하고 밤이 깊어서는 소리내지 않고 책을 읽어 공부하는 티를 내지 않았다. 가족들도 그녀의 학문진취를 알지 못하였으나 경전에 대한 조예와 성리학의 이해는 당시의 대학자들에 견주어 손색이 없었다. 이로 인해 형제들은 윤지당이 남자로 태어나지 못한 것을 한탄하곤 했다고 한다.
 

‘윤지당유고’는 그녀가 일생동안 저술한 글을 모은 문집으로 그녀가 죽은 지 3년 후인 1796년에 친정동생 임정주와 시동생 신광우가 간행하였다. 상편에는 인물전기인 전(傳) 2편, 역사인물 평론이라 할 수 있는 논(論) 11편, 책의 후기인 발(拔) 2편, 철학적 논문에 해당하는 설(說) 6편이 수록되어있다. 하편에는 자경문이라 할 수 있는 운문체의 잠(箴) 4편과 명(銘) 3편, 인물예찬서인 찬(讚) 1편, 가족들의 영전에 올린 제문 3편, 저자 서문에 해당하는 인(引) 1편, 유교경서의 해석서인 경의(經義) 2편이 수록되어있다.
 

윤지당이란 당호는 둘째오빠 임성주가 지어준 것인데 윤지(允摯)는 ‘태임과 태사를 독실히 신봉한다’는 뜻이다. 이는 주자의 윤신지(允莘摯)라는 글귀에서 따온 말로서 신(莘)은 문왕의 부인이었던 태사의 친정고향이며 지(摯)는 문왕의 어머니인 태임의 친정고향이다. 태임의 성씨가 임씨(任氏)였으므로 윤지당과 임성주는 더욱 친근감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국사편찬위의 이영춘 편사연구관의 인물평을 통해 윤지당의 됨됨이를 가늠해 보자.
 

“윤지당은 우리나라 여성사에서 매우 독보적인 인물이다. 그녀는 우리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업적을 이룬 여성학자였을 뿐만 아니라 당시의 봉건적 사회분위기로 보아 매우 진보적인 여성론을 제기하였다. 즉 남녀는 비록 그 역할이 다르지만 천성적으로 타고난 성품은 하등의 차이가 없으며 따라서 여성도 교육과 수양을 통해 성현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 때문에 윤지당은 여성들의 교육을 통한 실력배양과 윤리적 실천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그녀의 여성론은 서양 여성학 이론을 금과옥조로 여기고 있는 한국 여성운동가들에게도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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