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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여주인물을 소개합니다

역사속 여주인물을 소개합니다

  • 기자명 여주신문
  • 입력 2013.12.28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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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경하 - 51

▲ 조성문(여주문화원 사무국장)
원평부원군(原平府院君) 원두표(元斗杓)의 손자가 효종대왕의 다섯째 사위인 원몽린(元夢麟)이고 몽린의 손자가 경하(景夏)다. 원경하의 큰아들이 인손(仁孫)으로 젊은 시절 한때 국수(國手)라 불리울 정도의 이름난 노름꾼이었다.
 

어느 날 원경하가 아들의 솜씨를 시험해보고자 투전장 속에서 미리 인장(人將)을 빼내 감추어놓고서 인장을 찾아 뽑아 올리라 하였다. 못하면 크게 매질하겠다는 엄포가 뒤따랐다. 인손이 투전장을 받아 쥐고 한참동안을 만져보더니 ‘이 속에는 인장이 없습니다.’ 하니 원경하가 손에 쥐었던 인장을 내어보이고는 감탄하여 말을 잇지 못하였다. 이런 아들을 잘 다독거리며 과거를 준비시켜 마침내 우의정으로 만든 이가 원경하다.
 

원경하(元景夏 1698-1761)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화백(華伯), 호는 창하(蒼霞) 또는 비와(肥窩). 홍주목사를 지낸 명구(命龜)의 아들로 대신면 상구리에서 태어났다. 1721년 진사시험에 합격하고 1736년 정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이때 영조임금이 원경하를 인견하고 이르기를 “영릉(寧陵)의 외손(外孫)이 이제 비로소 등제하였으니 성조께서 아셨다면 가열(嘉悅)하실 것을 상상할 수 있다. 군신은 부자와 같은 것이니 내가 그대를 경계시키겠다.
 

근래의 유생들은 청금(靑衿)으로 있을 때 이미 쓸데없이 시상(時象)에 대한 의논이 있는데 그대가 처한 처지는 척신과 다를 것이 없으니 다른 사람들보다 배나 근신해야 된다. 인조·효종 두 조정에서 지성으로 조정(調停)했던 일을 그대로 들었을 것이니 모쪼록 우러러 본받도록 하라. 만인 시상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가묘(家廟)에 들어갈 수 없게 될 것이다.” 하였다. 이에 고무된 원경하는 “나라를 다스린다는 것은 조정을 화합시킨다는 것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대저 조정이라는 것은 한나라의 근본인데 근본이 화합하지 않고서 그 나라를 다스릴 수 있다는 말은 신이 듣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전하께서 지극한 정치를 바라신다면 먼저 조정을 화합시키시는 것 만한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마음 안에 황극(皇極)을 세워서 동서남북의 사람이 황극을 따르도록 가르치고 행하여 화평한 정치와 교화를 펴고 나서야 황극의 정치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아뢰면서 한걸음 더 나아가 “탕평의 정사는 아름답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마는 노론과 소론만을 호대(互對)하면 어찌 인심을 복종시킬 수 있겠습니까? 동인, 서인, 남인, 북인을 물론하고 재주에 따라서 쓴 뒤에야 공도(公道)를 넓힌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며 당시에 시행되고 있던 소탕평(小蕩平)을 반대하고 이른바 대탕평(大蕩平)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원경하는 소론의 온건파 조현명(趙顯命)과 함께 임금이 탕평책을 펴는데 중심역할을 하게 된다.
 

1737년 호남별견어사(湖南別遣御史)가 된 원경하는 전라도 부안에서 두레의 농기인 깃발과 풍물의 연장이 백성들의 반란 시에 중요한 구실을 할 것으로 보고 이를 관아로 압수하였는데 농민들의 백년민속(百年民俗)을 금지시킨 것이라 하여 논란이 일기도 했다. 이 일은 풍물에 관한 최초의 탄압으로 기록되어있다. 1761년 5월27일 원경하가 죽었다. 그의 졸기에 보면 “봉조하(奉朝賀) 원경하가 졸하였다. 문벌과 집안이 존귀하였는데 원경하가 젊어서부터 문사(文辭)를 좋아하였으며 몸단속하기를 검소하고 간략하게 하여 야윈 말에다 해어진 안장을 쓰고 의복을 소박하게 입었으므로 사람들이 그가 도위(都尉) 집안의 손자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속마음은 바르지 않고 험악하며 거칠고 사리에 어긋나 다른 사람과 뜻이 맞는 경우가 적었으며 경대부(卿大夫)로서 자기에게 아첨하지 않는 자는 기를 꺾고 험담하였으므로 그가 내뱉는 말에는 완전한 선비가 없었다.”고 되어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의 탕평 노력과 당인들을 고루 대하는 인품을 칭송하였다. 특히 영조의 신임이 두터웠고 그의 탕평책에 많은 귀를 기울였다.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문(忠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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