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상(金鎭商 1684-1755)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여익(汝翼), 태백(太白). 호는 퇴어(退漁).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의 현손으로 아버지는 판서로 증직된 김만채(金萬埰)이며 어머니는 전의(全義) 이씨로 집의 항(抗)의 딸이다. 1699년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712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지평, 부교리를 역임하였다. 1719년(숙종45) 3월 장희빈(張嬉嬪)의 묘를 옮길 때에 세자가 망곡례(望哭禮)를 행하는 것을 두고 논란이 일었다. 지평으로 있던 김진상은 공자(孔子)가 아들 백어(伯魚)에게 한 말을 예로 들어 세자의 망곡례가 불가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영의정 김창집(金昌集), 우의정 이건명(李健命)등이 “개장(改葬)은 비록 초장(初葬)과는 다르더라도 무릇 예절은 한결같이 초장의 의례를 준수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망곡례가 거행되었다.
이듬해 세자였던 경종이 즉위하자 김진상은 ‘사친(私親)에 대한 정성을 가로막은 죄인’으로 몰려서 무산(茂山)으로 귀양을 갔다. 4년 뒤 영조가 임금이 되니 ‘김진상에게 80세 된 노모가 있으나 돌볼 형제가 없으니 불쌍하다’는 논의가 일어 유배에서 풀려났다. 풀려난 김진상은 “… 예기에 이르기를 ‘아비의 후사된 자는 쫓겨 난 어미를 위해 상복(喪服)을 입지 않는다.’ 하였고 임오년 초기(初朞) 때에도 곡을 하지 않았는데 개장할 때 궁관과 신료들을 거느리고 곡을 한다는 것은 불가한 것이었습니다. …” 라는 상소를 올려 귀양살이의 억울함을 토로하기도 하였다.
이후 벼슬에 뜻을 잃은 김진상은 고향 여주에 살면서 8로(八路)를 두루 유람하며 시(詩), 술과 더불어 산수를 즐기니 사류(士類)들이 모두 칭찬했다고 한다. 임금이 그의 지조와 재주를 아껴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렸으나 모두 사양하면서 다만 상소로써 임금이 올바른 정사를 펴도록 부탁할 뿐이었다. “…전하께서는 사정을 끊고 정대하게 일을 처리하여 치우치는 흠을 없애며, 허물을 고치기는 바람·천둥처럼 빨라서 조금도 인색하지 말고, 착한 것을 따르기는 급류가 흐르듯이 하여, 오직 미치지 못할세라 염려하며, 사령(辭令)을 내면 반드시 신중하기를 힘쓰고, 시비를 정하면 반드시 견지하기를 힘쓰며, 작은 은혜를 어진 것으로 여기지 말고, 잗달게 살피는 것을 밝은 것으로 여기지 말며, 희노(喜怒)에 따라 사람을 상벌하지 말고, 이록(利祿)으로 사람을 부리지 말며, 귀에 거슬리는 말을 싫어하지 말고 … 조정(調停)하는 폐습을 없애고, 탕평(湯平)의 실효를 거두어 백성을 화평하게 하고, 영명(永命)을 비는 도리로 삼으소서. …” 1741년(영조17) 임금이 언제나 조용하고 깨끗한 그의 성품을 칭찬하면서 “절후가 추운 뒤에야 송백(松柏)은 시들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김진상은 신축·임인년 이후로 이편에도 물들지 않고 저편에서도 미움을 받지 않았으며 글을 올려 아뢰는 즈음에도 끝내 그런 버릇이 없었다.”고 전교하고 특지(特旨)로 대사헌에 발탁하였다. 이에 김진상이 “편당에 물들지 않아서 미움받지도 않았으므로 마침내 당습(黨習)에 없었다는 하교에 신은 매우 부끄러움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신이 일찍이 한가지 일도 논하지 않았던 것은 바로 물러난 신하로서의 의리를 자처한 것이었고 감히 당습을 미워하여 망설인 적은 없었습니다.…” 라며 사직상소를 올렸다. 김진상은 이처럼 청렴함을 지키며 부끄러워 할 줄 아는 즉 염치를 아는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