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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여주인물을 소개합니다

역사속 여주인물을 소개합니다

  • 기자명 여주신문
  • 입력 2013.11.29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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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진원- 47

▲ 조성문(여주문화원 사무국장)
노론의 도움을 얻어 임금자리에 오른 영조(英祖)에게 있어서 탕평책의 수행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영조임금은 자신의 지지세력인 노론에게 기득권을 포기하라고 종용하는 한편 자신을 역적으로 몰았던 소론을 용서하고 등용해야하는 이율배반적 위치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주사람들이 영조의 탕평책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다. 그러나 영조의 탕평책을 강하게 거부한 여주사람도 있었다. 그가 민진원이다.
 

민진원(閔鎭遠 1664-1736)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성유(聖猷), 호는 단암(丹巖), 세심(洗心). 아버지는 여양부원군 민유중(閔維重)이며 어머니는 좌찬성 송준길(宋浚吉)의 딸이다. 민진원은 인현왕후(仁顯王后)의 오빠이기도 하다.
 

송시열의 문인으로 1691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나 당시는 인현왕후가 유폐되고 노론이 탄압을 받던 때라 등용되지 못하다가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로 인현왕후가 복위된 뒤 벼슬길이 트였고 1697년 중시에 을과로 급제하여 본격적인 벼슬길에 올랐다. 병조좌랑, 지평, 전라도 관찰사, 공조참의, 강화부유수를 지냈고 1712년 사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대사성, 이조 공조판서, 우의정, 좌의정, 중추부영사, 봉조하가 되었다. 노론의 중심인물이었던 민진원은 소론의 대표로서 백사 이항복(李恒福)의 현손인 이광좌(李光佐), 이태좌(李台佐)등과 크게 대립하고 있었다. 이들도 나름대로 공명정대한 왕도정치를 위해 탕평책을 주장하였으나 임금과는 극명한 방법의 차이를 보였다.
 

영조 2년 1월1일. 민진원이 “옳은 것을 상주지 않고 그른 것을 죄주지 않으며 너그럽지 않을 데에 너그럽고 준엄할 데에 준엄하지 않으므로서 탕평은 커녕 난망(亂亡)하는 길로 나아가고 있습니다”라며 임금을 꼬집었다. 영조 9년 2월3일 이광좌가 아뢰기를 “‘처지를 바꾸면 같다’고 하셨는데 대개 사람은 각각 같지가 않은데 어찌하여 처지가 바뀐다고 해서 같아지겠습니까? 신이 죄가 있다면 죄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청컨대 큰 벌을 내려 나라의 체통을 높이게 하소서.”하면서 줄건 주고 받을 건 받겠다는 단호한 입장을 보였다. 이에 임금이 오른손으로는 이광좌의 손을 잡고 왼손으로는 민진원의 손을 잡고서 회유하였으나 이들은 듣지 않았다.
 

영조 11년 7월15일 마침내 이들 사이는 함께 대궐에 입시하는 것조차 꺼려할 정도로 멀어졌다. 영조 12년 3월19일 임금이 이번에는 민진원과 이태좌를 화해시키기 위해 이들을 희정당(熙政堂)으로 불러 술자리를 벌였다. 민진원의 아들 민형수(閔亨洙)와 이태좌의 아들 이종성(李宗城)도 함께 불렀다.
 

임금이 명하여 술잔을 가져다가 마주대하여 마시면서 유감을 풀도록 하고 이르기를 “어찌하여 서로 다투느냐?” 하자 이종성이 취하여 아뢰기를 ‘민형수의 아비가 신의 아비와 함께 기로소에 들어갔으니 신의 아비는 바로 그의 아비와 같습니다. 그의 상소에 신의 아비를 기롱한 말이 있었는데 이는 불초(不肖)한 자식입니다’ 하고 ‘이 당(黨)’이니 ‘저 당(黨)’이니 하면서 서로 용권(用權)하였다고 배척하면서 양보하지 않았다. 자리를 파함에 이르러 임금이 민진원과 이태좌에게 의자 앞으로 나와서 서도록 명하고 손을 잡고 위유(慰諭)하고는 문피(文皮)를 내리고는 의자에서 내려와 전송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해 11월 28일 민진원이 죽음으로서 화해의 결말은 보지 못하고 말았다. 민진원이 죽자 임금이 몹시 슬퍼하며 하유하기를 “민봉조하는 휴척(休戚)을 함께하는 신하로서 고집하는 것은 막힌 점이 있으나 나라를 위하는 단심(丹心)은 변함이 없었으니 내가 전후에 간격없이 대우했던 것은 그것 때문이었다. …” 하였다.
 

민진원은 여주시 단현동에 90여칸 짜리 집을 짓고 남한강 가에 침석정(沈石亭)이라는 누각을 세워 노후를 즐겼다. 침석정이 있었던 바위에는 단암(丹巖)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그의 호는 여기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글씨를 잘 쓰고 문장에 능하였다. 시호는 문충(文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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