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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여주인물을 소개합니다

역사속 여주인물을 소개합니다

  • 기자명 여주신문
  • 입력 2013.11.01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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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여 - 43

   
▲ 조성문(여주문화원 사무국장)
스승 송시열(宋時烈)과 제자 윤증(尹拯)간의 대립을 흔히 ‘회니시비(懷尼是非)’라 부른다. 송시열이 회덕(懷德)에 살았고 윤증이 논산의 이성(尼城)에서 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회니시비’는 예송논쟁 중에 윤선거(尹宣擧)부자가 윤휴의 의견에 동조하자 반대편에 있던 송시열이 병자호란 때 윤선거의 강화도수난과 탈출사건을 들고 나오면서 시작되었다.
 

윤선거는 강화도에 있을 때 친구들과 함께 의병을 모집한 뒤 성을 사수하기로 약속했었다. 그러나 강화도가 청나라 군사에게 함락되던 날 친구들과 윤선거의 처는 자결하였으나 윤선거는 적군에게 무릎을 꿇어 구차히 목숨을 구걸하고는 노비로 위장하여 강화도를 빠져나왔다. 강화도의 일을 반성하며 초야에 묻혀살던 윤선거가 1669년에 죽자 아들 윤증이 아버지의 묘비명을 지어달라고 스승에게 부탁했다. 그러나 평소 윤선거 부자를 탐탁지 않게 여기던 송시열은 대충 비명을 지어 보내면서 윤선거의 덕을 기리는 구절에 이르러 ‘망연해 할 말을 알 수 없다.’고 적은 뒤 ‘나는 다만 기술만 하고 짓지는 않았다.(我述不作)’라고 마무리했다. 이에 섭섭함을 느낀 윤증이 4-5년에 걸쳐 편지를 보내거나 직접 찾아가 개찬을 청했으나 송시열은 끝내 비문의 요지는 손대지 않고 글자 몇 군데만 고쳐주었을 뿐이다. 이 일로 스승과 제자는 갈등 끝에 의절하면서 송시열의 노론과 윤증의 소론으로 갈라졌다.
 

1716년(숙종 42) 2월 송시열과 윤증간의 사제의리가 끊어진 일에 대한 시말을 논하면서 윤증을 비난하는 상소가 올라왔다. 이를 계기로 윤선거의 문집을 훼판(毁版)토록 하는 처분이 내리고 윤선거 부자에 대한 선정(先正) 칭호를 금하며 관작까지 추탈하라는 명령이 떨어지게 된다. 이 상소의 주인공이 이여다.
 

이여(1645-1718)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자삼(子三), 치보(治甫). 호는 포음(浦陰), 수곡(睡谷). 이조판서 이식(李植)의 손자로 아버지는 이신하(李紳夏), 어머니는 신후완(辛後完)의 딸이다. 1662년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680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이 되었다. 대사성, 이조참의, 대사간, 대사헌, 대제학 등을 역임하고 1702년 좌의정, 1706년 판의금부사, 1710년 영의정이 되었다. 이여가 도승지로 있을 때 벼슬을 그만두고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고향 여주로 내려왔다.
 

당시 이여는 기도(器度)가 단정하고 깨끗하며 문사(文辭)가 풍부하고 우아했으며 언론이 구차하지 않고 조행(操行)이 확고하여 김창협(金昌協) 다음가는 명망을 얻고 있었다. 그가 매번 아버지의 유계(遺戒)와 어머니의 병환을 이유로 조정에 오래 머물러 있지 못했는데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묻자 “나는 세속을 떠나서 몸을 깨끗이 하는 선비가 아니니 조정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된다면 어찌 벼슬하려고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현재의 조정은 처분하는 바와 묘당(廟堂)의 모의하는 바가 모두 천리(天理)에 위배되고 인정에 어긋나니 만일 한마디 말로써 구제하려 한다면 여러 사람들의 분노를 격발시켜 더욱 궤열(潰裂)시킬 뿐이고 말을 하지 않고 따라가기만 한다면 이는 선인(先人)의 진취에 대한 경계를 범하는 것이니 내가 차마 할 수 없다. 그러니 마땅히 잠깐 나아갔다가 잠깐 물러났다가 하면서 신자(臣者)의 분의(分義)나 폐하지 않아야 할 뿐이다.” 하였다.
 

이여의 졸기다. “…국세를 진작시키고 조정의 화합을 위해 과격하거나 각박한 의논을 한 적이 없었다. 사문(斯文)의 큰 시비를 당하여서는 의연하게 의논을 정립하여 조금도 흔들리거나 의혹되지 아니하니 사람들이 그 학력을 증험하게 되었다. 지위가 공상(公相)에 올랐으나 몸가짐은 한결같이 포의의 선비처럼 하였으며 집이 좁고 누추하였으나 거처하는 데에 여유가 있었다. 임종시에는 온화하여 마치 편안히 잠자는 것 같았는데 다음날에 이르러서도 얼굴색이 조금도 변하지 아니하니 사람들이 모두 기이하게 여겼다.” 시호는 문경(文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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