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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여주인물을 소개합니다

역사속 여주인물을 소개합니다

  • 기자명 여주신문
  • 입력 2013.10.18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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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정중 - 41

   
▲ 조성문(여주문화원 사무국장)
인조(仁祖)의 묘호를 정할 때 부수찬 유계(兪棨)가 이미 인종(仁宗; 조선12대 임금)의 호칭이 있으므로 인(仁)자를 쓸 수 없다고 주장하다 효종의 노여움을 사서 함경도 온성(穩城)으로 유배를 갔다.
 

이듬해 귀양에서 풀려난 유계가 돌아오는 길에 한 젊은 선비를 만났다. 마침 같은 방향이었으므로 말동무를 하며 동행하게 되었는데 해질 무렵, 다리를 건너던 선비가 냇물에 빠지고 말았다. 부실했던 다리가 무너져 내린 탓이었다. 다행히도 크게 다치지 않은 선비는 젖은 옷을 말리고 갈테니 유계에게 먼저 주막에 가 있으라 했다. 한참을 기다려도 선비가 오지않자 걱정이 된 유계는 선비를 찾아 나섰고 얼마 후 땀을 뻘뻘 흘리며 다리를 헐어내고 있는 선비를 발견했다. ‘아니, 여보게 선비! 자네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하는가?’ 하니, 젊은 선비는 “예, 다리를 부수고 있습니다. 저는 비록 다치지 않았지만 날이 어두워 뒤따라오는 과객들이 이 다리로 인해 다칠 것이 분명하니 이것을 헐어버려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하였다. 이 사려깊은 젊은 선비가 민정중이다.
 

민정중(閔鼎重 1628-1692)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대수(大受), 호는 노봉(老峯). 관찰사 민광훈(閔光勳)의 아들이다. 1649년 정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예조좌랑을 지냈다. 그가 부사과(副司果)로 있을 때 올린 상소문이 효종(孝宗)임금의 마음을 크게 감동시켰으니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 첫째 수령과 감사를 잘 뽑아 백성을 사랑하는 근본으로 삼으십시오. 둘째 인재를 잘 헤아려서 책임을 맡기십시오. 셋째 신하들을 자주 접견하여 아랫사람의 뜻을 소통시키십시오. 넷째 인륜을 밝히고 교화를 열어주십시오. 다섯째 명분을 엄하게 하여 예모를 높이십시오. 여섯째 기강을 일으켜 염치를 권장하십시오. 일곱째 인정을 베풀어 억울함을 풀어주십시오. 여덟째 전례를 중시하십시오.’ 이에 임금이 답하기를 ‘그대의 소장을 보고 가상히 여겨 마지 않았다. 그대는 나이 어린 학사로서 사무를 통달하고 세태를 알고 있는 것이 어찌 이렇게도 해박한가. 사안에 따라 할 말을 다하고는 숨기는 것이 없으니 내 마음에 더욱 가상하게 여겨진다.
 

어찌 깊이 유념하지 않겠는가. 그대도 또한 나쁜 세속에 물들지 말고 이 충직한 기개를 잘 길러나가 원대한 성취를 기약하도록 하라.’ 하고는 특별히 호피(虎皮)를 하사하였다. 민정중은 1659년 현종이 즉위하자 병조참의, 동부승지, 대사성, 함경도관찰사, 대사헌, 이조·호조·공조판서, 한성부윤, 의정부참찬등을 지냈다.
 

1675년 숙종때에 다시 이조판서가 되었으나 남인의 배척으로 장흥(長興)으로 귀양갔다가 이듬해 풀려나와 우의정, 좌의정에 올랐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다시 남인이 집권하게 되자 관직을 삭탈당하고 벽동(碧潼)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그의 졸기를 보면 “전 좌의정 민정중이 벽동의 적소(謫所)에서 졸하였는데 65세였다. 사람됨이 영특하고 강직하여 굴하지 않았으며 예법으로 자신을 신칙하였다. 일찍이 괴과(魁科)에 올랐고 극력 청의(淸議)를 붙들었으며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등 제현이 가장 중시하는 바가 되었다.
 

국자감의 장관이 되어 선비들을 조성해 내는데 매우 공효가 있게되므로 당시에 정엽(鄭曄) 이후의 제일인 사람이라고 했다. 다른 관직에 뽑혀서도 겸임하고 체직되지 않았으며 게을리하지 않고 교도하므로 선비들의 풍습이 크게 바뀌게 되었다. 뒤에 윤휴와 허적이 나라의 일을 맡게되자 남쪽 변방으로 귀양갔었는데 비록 배척받는 가운데 있었지만 여망은 더욱 높아져 오늘날의 진요옹(陳了翁)이나 유원성(劉元城)같은 사람이라고 하게 되었다. … 기사년의 변(變) 뒤에는 뭇 간신들이 기필코 죽이려고 하면서도 오히려 돌아보며 두렵게 여기는 바가 있어 실행하지 못했었다. 이때에 이르러 졸하였는데 뒤에 관작을 복구하고 시호를 문충(文忠)이라고 하였다.”고 되어있다. 묘는 상거동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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