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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여주인물을 소개합니다

역사속 여주인물을 소개합니다

  • 기자명 여주신문
  • 입력 2013.07.19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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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엽(鄭曄)- 30

   
▲ 조성문(여주문화원 사무국장)
금사면에 있는 기천서원(沂川書院)에는 조선시대 유현(儒賢) 8명의 위패가 봉안되어있다. 그중의 한사람이 정엽이다.
 

정엽(鄭曄 1563∼1625)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시회(時晦). 호는 수몽(守夢), 설촌(雪村). 진사를 지낸 정유성(鄭惟誠)의 아들로 영의정 이산보(李山甫)의 사위다. 3세때 글을 배워 4세때 시를 지음으로서 이이(李珥)와 정유길(鄭惟吉)로부터 신동이라는 칭찬을 받았다. 이지함(李之 )의 주선으로 송익필(宋翼弼)에게서 수학하고 성혼(成渾), 율곡에게서도 가르침을 받았다.
 

송익필은 기묘사화(己卯士禍)때 고변한 송사련(宋祀連)의 아들로 이산해, 최경창등과 함께 8문장(八文章)으로 불리웠으나 정여립 모반사건을 다룬 기축옥사(己丑獄事)에 개입함으로써 비난을 받은 사람이다. 이 일로 제자인 정엽도 구설수에 올랐다. 정엽은 1583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서 벼슬을 시작하였고 형조좌랑, 여주목사, 성균관사성, 수원부사, 응교, 집의, 대사간 등을 지냈다. 1602년 정인홍이 권력을 잡자 성혼의 문인이라는 혐의를 받고 종성부사로 좌천되었다.
 

이때 북병사 이용순이 장계를 올리기를 “종성부사 정엽은 중풍에 걸린 지 반년이 되었는데 지금은 여름철인데도 문을 열고 낯을 드러내지 못하고 모든 문서에도 손을 들어 서압(署押)하지 못하므로 직무를 전폐하여 공무를 살피지 않습니다. …”하였다. 사헌부도 “정엽이 도임한 뒤로 병을 핑계삼아 관아의 일을 폐가하여 방비하는 모든 일을 돌보지 않고 자리가 바뀌기만을 바라 근심을 끼쳤습니다. 또한 육진에서 가족을 거느리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인에 정엽의 아내가 법을 어기고 내려간 뒤에 올라오지 않고 있으니 파직하소서.” 하고 아뢰었다. 그러나 정엽은 종성(鐘城)에서 학교교육을 크게 일으켰는가 하면 병든 몸을 수레에 싣고 성에 올라가 수많은 오랑캐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막아내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척을 지고 살던 기자헌(奇自獻)의 농간으로 동래(東萊)로 유배되었다가 1605년에 풀려나 성주목사, 홍주목사가 되었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예조참의, 대사성, 충청감사, 도승지를 역임하였다. 1617년 폐모론이 제기되자 양양(襄陽)부사를 자원하였고 인목대비가 폐위되자 관직을 버리고 사저가 있는 여주로 돌아와 지냈다. 이후 광해군이 여러차례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인조가 즉위하자 특명으로 대사성과 대사간을 겸하였다. 성균관 대사성으로서 타직을 겸하는 예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1625년 유순익, 김장생 등과 함께 사노(私奴)로 환천되어 떠돌아다니다 죽은 스승 송익필의 신원(伸寃)을 청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한 채 2달여 만에 죽었다. 졸기에 그의 사람됨이 잘 드러나 있다. “전 대사헌 정엽이 졸하였다. 용모가 준수하고 기국이 웅걸했다. 일찍이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뜻을 두고 율곡(栗谷)과 우계(牛溪)의 문하에 종유하여 조예가 더욱 깊었다. 가정에 있어서는 효우가 돈독하였고 부모를 섬기는 일이나 장제 등은 일체 가례(家禮)를 따랐다.
 

선조 때 과거에 급제하여 안팎의 관직을 두루 거치고 명망이 높이 드러났으나 성품이 본래 남과 타협하는 일이 적었다. 그래서 기자헌에게 미움을 사서 폄출(貶黜)되기도 하고 법망에 걸리기도 하였지만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광해군도 그의 명망과 행실을 중히 여겨 상당히 등용하였다. 인조반정후 광해가 스스로 천명을 단절하였으니 신하들은 곡읍(哭泣)하며 전송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니 모두가 놀랐다. 상은 그가 크게 쓸 만한 인재임을 알고 누차 발탁하였는데 항상 대사헌겸 대사성으로 학제를 제정하고 과업을 권장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원자의 보양관을 겸하였고 원자가 동궁이 된 뒤에는 우부빈객을 겸하였다.
 

숭정대부의 품계에 차서를 뛰어 제수되었는데 얼마 안가서 작고하였으므로 상이 매우 애도한 나머지 세자와 소선(素膳)을 들었다.…” 우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숙(文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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