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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여주인물을 소개합니다

역사속 여주인물을 소개합니다

  • 기자명 여주신문
  • 입력 2013.07.05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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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백겸(韓百謙)- 28

   
▲ 조성문(여주문화원 사무국장)
한백겸(韓百謙 1552∼1615) 본관은 청주(靑州). 자는 명길(鳴吉), 호는 구암(久庵). 아버지는 경성판관 한효윤(韓孝胤)이며 어머니는 예빈시정 신건(申健)의 딸이다. 1579년 생원시에 동생들과 함께 합격하였으나 이듬해 부친상을 당하면서 과거를 포기하고 경서와 성리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1585년 교정청이 신설되자 정구(鄭毬)등과 함께 교정낭청에 임명되어 경서훈해(經書訓解)의 교정을 보았다.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 때 모반에 실패하여 자살한 정여립을 위해 곡을 하며 시신을 정성스레 염한 사실이 발각되고 또한 정여립의 생질인 이진길(李辰吉)과 친분이 두터웠다는 이유로 연좌되어 장형을 받고 귀양갔다가 임진왜란 때 석방되었다. 1595년 호조좌랑, 1601년 형조좌랑과 청주목사를 지냈다.
 

청주목사 시절 안문어사(按問御史) 성진선(成晉善)이 순찰하고 탐문한 결과를 임금께 올렸는데 그 내용이 실록에 전한다. “신이 주군을 안행하면서 수령들의 현부(賢否) 및 불법에 대한 일을 탐문하였습니다. 청주목사 한백겸은 자상하여 백성을 사랑하고 강명하게 다스려 속리(俗吏)의 부화스런 작태를 물리쳐버리고 힘써 돈실한 정사를 행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문교가 퇴폐된 때를 당하여 홀로 능히 학교를 흥기시키는 것으로 자기의 책임을 삼아 공무에서 물러나온 여가에는 언제나 제생의 선비들과 경의를 강론하고 공용의 남은 재물을 덜어내 경적을 널리 구입하여 선비들로 하여금 분발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후 한백겸은 호조참의, 강원도 안무사 등에 기용되었다가 1611년 파주목사를 끝으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벼슬을 사임하고 양주 물이촌(勿移村)에 퇴거해 있는 동안 역학에 해박하다하여 선조 때부터 편찬하기 시작하였던 주역전의(周易傳義)의 교정을 보기도 했다. 그는 유몽인, 이수광, 허균 등과 함께 조선 실학의 선구자로서 실증적이며 고증학적인 방법으로 조선의 역사, 지리를 연구하고 종래 역사가들의 학설을 비판, 수정하여 이 방면에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1614년에 시작하여 다음해 6월에 그가 완성한 역사지리서가 동국지리지(東國地理誌)이다.
 

이 책은 중국사서의 열전에 기록된 한반도 부족국가에 대한 서술을 인용한 부분, 삼국에 대한 서술부분, 고려에 관한 서술부분등 3부분으로 이루어졌다. 부족국가편에서는 각 부족의 위치, 강역, 종족, 사실의 신빙성문제를 언급했고 삼국편에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순서로 국도, 봉강, 형세, 관방에 중점을 두어 밝히고 있다. 고려편에서는 개성부, 서경, 남경 등 주요도시들에 대한 설명과 형승 등이 기재되어 있다. 이 동국지리지는 우리나라 역사지리학의 창시라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가 있으며 이후의 역사지리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1615년 7월3일. 전 참의 한백겸이 졸하였다. 사람됨이 단아하였고 마음가짐이 관대하였다. 어려서 행촌(杏村) 민순(閔純)에게 사사받았으며 역학에 정미하였고 예서에 더욱 힘을 기울였다. 천거로 벼슬길에 나왔으며 집에 있으면서는 지극한 효우의 행실이 있었고 여러차례 주군(州郡)을 맡았는데 순리(循吏)라고 칭해졌다. 신해년 파주목사에 제수되었으나 폐조(廢朝 : 광해군 시절)의 정치가 어지러움을 보고는 즉시 관직을 버리고 서호의 작은 농장으로 돌아가 경전을 깊이 탐구하다가 이 때에 이르러 졸한 것이다.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에서도 한백겸의 인품을 엿볼 수 있다. “…평소에도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 정신을 집중하고 고요한 모습을 유지하였으나, 글을 읽어도 입에서 소리를 내지 않아 바라보면 장중(莊重)하여 가까이 할 수 없을 것 같았는데, 정작 사람을 대하면 화평(和平)하고 낙이(樂易)하여 정성을 다 쏟았으므로 현우(賢愚)를 막론하고 모두 환심을 샀다.”
 

이해 9월에 원주(原州)의 치소(治所) 서쪽 가마도(佳麻島: 지금의 부평리 가마섬)의 선조(先兆) 아래에 장사를 지냈다. 한백겸의 동생은 인조의 장인으로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에 봉해진 한준겸(韓浚謙)이고 아들은 효종 때 우의정을 지낸 한흥일(韓興一)이다. 한백겸은 뒤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으며 원주의 칠봉서원(七峰書院)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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