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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여주인물을 소개합니다

역사속 여주인물을 소개합니다

  • 기자명 여주신문
  • 입력 2013.06.28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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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민(洪聖民)-27

   
▲ 조성문(여주문화원 사무국장)
기복(起復)이란 상중에 있는 관리를 탈상(脫喪) 전에 복직시켜 기용하는 일을 말한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발발하던 해인 1592년 홍성민의 모친이 별세했다. 그가 분상(奔喪)하기위해 고향으로 떠나자 비변사(備邊司)에서 “익성군 홍성민은 여러 가지로 군국에 대한 모의와 사대문서(事大文書)에 많은 힘이 되었던 사람입니다. 전례에 따라 기복시키소서”하고 아뢰니 임금이 따랐다. “삼년상(三年喪)은 고금을 통하여 상하가 다같이 행하는 것이다. 아무리 큰 난리를 만난 시대라 하더라도 반드시 일세(一世)의 치란에 관계되는 사람이어야만 부득이 상중에 기복시킬 수 있다"라는 실록의 기록으로 알 수 있듯이 아무나 기복시키지는 않았다. 홍성민의 기복에 비변사가 나섰다는 것은 그만한 자격이 그에게 있었다는 반증이다. 홍성민(洪聖民 1536∼1594)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시가(詩可). 호는 졸옹(拙翁). 관찰사 홍춘경(洪春卿)의 아들로 여주에서 태어났다.
 

1561년 진사시험에 장원급제하였고 1564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합격하여 정자·교리를 지냈다. 1567년 사가독서(賜暇讀書)한 뒤 판중추부사에 이르렀다. 홍성민이 호조참판으로 있을 때 사은사로 명나라에 들어가 종계개정(宗系改正)을 청하여 황제의 허락을 받아왔다. 이 일로 광국공신(光國功臣) 2등에 책록되고 익성군(益城君)에 봉해졌다. 석전(石戰; 돌싸움)은 정월 대보름과 단오에 두편의 마을사람들이 개천이나 강을 경계로 돌멩이를 던지며 싸우다가 맞붙어 이른바 백병전을 벌이는 놀이다. 이미 삼국시대부터 행해졌다는 기록이 있는 석전은 돌과 기와조각이 난무하는 격렬함으로 인해 사상자가 많이 발생하곤 하였다.


사람이 다치는 것을 걱정한 세종대왕이 한때 이 놀이를 금하였으나 예종 때 다시 시작되었다가 일제식민시절에 탄압을 받고 자취를 감추었다.
 

경상도 관찰사로서 경주(慶州)를 순시하던 홍성민이 정월대보름날 밤에 벌어지는 석전을 처음 구경했던 모양이다. 그 감상을 적은 글이 그가 지은 졸옹집(拙翁集)에 남아있다. “… 싸움이 일단 시작되면 돌멩이는 손에 쥐어지고 쥐어진 것은 돌멩이 뿐이어서 있는 힘을 다하여 숨을 몰아쉬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누구보다도 용감하게 가로 치닫고 앞으로 돌진하고 마치 미치광이처럼 날뛴다. 던질 때는 반드시 남보다 먼저 던지고 싸움도 혹시 남에게 뒤질세라 자식이 아비에게, 아우가 형에게, 척속(戚屬)이 척속에게, 이웃이 이웃에게 마구 돌 팔매질을 퍼붓는다. 이미 너와 나로, 원수로 갈린 이상 반드시 상대와 맞서고 상대를 이겨서 내가 장해지고 내가 올라서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머리가 깨져 피가 흐르고, 살갗이 찢기어 살이 드러나고, 머리를 싸매고, 발이 갈라지고, 기가 죽고, 털이 빠지고 하여 구렁텅이에 쭈그리고 앉아 깊이 숨도 못쉬게 만들어 놓아야만 비로소 내 마음이 시원하여 의기양양하게 말하기를 ‘내가 이겼다. 상대는 도망쳤다. 이제 나는 금년의 길운을 차지하여 우환도 없을 것이고 질병도 없을 것이다’하고 좋아한다.
 

싸움이 끝나고 난 후에는 아비에게 돌팔매질을 했던 자식이 말하기를 ‘내가 감히 우리 아버지에게 돌팔매질한 것이 아니라 싸움 그 자체에다 돌멩이를 던졌을 뿐이다.' 한다. … 다만 이해(利害)라는 그 한 생각이 속에서 맹동하고 있고 잘못된 습속이 마음에 고질화되어 얼마나 사람들을 그릇되게 만들고 있는 것인가 …” 1591년 광해군(光海君)을 왕세자로 책봉하자고 주장한 송강(松江) 정철(鄭澈)이 내심 신성군(信誠君)을 마음에 두고 있던 선조임금의 노여움을 사 삭탈관직 되면서 실각하자 홍성민도 정철의 일당으로 몰려 함경북도 부령(富寧)으로 귀양을 가기도 했다.
 

홍성민은 매우 청렴결백하여 사사로운 이(利)를 쫓지 않았으며 효성이 지극했고 또 문행(文行)과 정술(政術)이 본받을 만 해서 명신(名臣)으로 칭송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며 묘는 금사면 이포리(梨浦里)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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