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성문(여주문화원 사무국장) |
조선 태조에 관한 종계오기는 명나라와는 무관한 일이었지만 건국직후의 조선으로서는 왕통의 합법성이나 왕권확립에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이를 바로잡기 위하여 조선은 10여 차례에 걸쳐 주청사(奏請使)를 파견한 끝에 1589년(선조22) 성절사(聖節使) 윤근수(尹根壽)가 수정된 <대명회전>을 받아옴으로써 그 해결을 보았다. 그러나 이에 앞서 여주사람 김주가 주청사로 명나라에 가서 지지부진하던 종계변무 문제에 관한 중요한 진전을 이루어 낸바 있었다.
김주(金澍 1512∼1563)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응림(應霖). 호는 우암(寓菴). 안원군(安原君) 김공량(金公亮)의 아들이다. 19세의 김주는 몸이 장대하고 기력이 보통사람 이상이었다고 한다. 언젠가 장난삼아 손님의 옷 뒷자락을 기둥아래 펼쳐 넣었다. 기둥을 쳐들고서 그 밑에 끼워 둔 것이었다. 손님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이별을 고하며 일어서는데 뒤쪽에서 무언가가 잡아당기므로 괴이하게 여겨 돌아보고는 놀라서 경탄하였다. 이에 김주가 웃으면서 다시 기둥을 들어서 옷자락을 꺼내 주었다는 이야기가 행장에 실려있다.
1531년 진사가 되고 1539년(중종 34)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1544년 사가독서(賜暇讀書)이후 이조정랑, 대사성, 대사간, 한성부우윤, 대사헌, 전라도·황해도 관찰사, 개성유수, 예조참판 등을 지냈다.
김주가 장원급제 하던 때의 일이다. 김주가 별시에 응시하러 간 뒤, 집안에 있던 모든 유기(유기)가 홀연히 은홍색으로 바뀌었다. 또한 김주가 쓰던 세숫대야가 갑자기 회오리 바람에 날려 빙글빙글 돌면서, 땅에서 서너 장 높이로 떴다가 내려왔는데 상하거나 찌그러진 곳이 한 군데도 없었다. 집안 사람들이 모두 괴이하게 여기고 상서롭지 못하다고 여겼으나 얼마 있다가 여종을 부르는 소리가 문 밖에서 왁자지껄하게 들리며 김주의 장원을 축하하는 행렬이 들이닥쳤다.
김주의 아버지 세대는 종친인 이심원(李深源)에게 학문을 배웠고 이로 인해 혼인으로 종실과 인연을 맺을 수 있었다. 김주의 작은 아버지 김공석(金公奭)은 성종의 손자를 사위로 맞이하였고 김주는 태종의 5대 손녀와 결혼하였으며 성종의 딸인 정숙옹주(靜淑翁主)의 손자를 사위로 삼았다.
1563년 9월 종계변무에 대한 주청사로 북경에 갔던 김주가 “종계에 대한 주청은 이미 성지를 받들어 국조(國祖)의 부(父)의 성휘(姓諱)를 분명히 기록하였습니다.‘라고 장계를 올렸다. 마침내 김주의 주청으로 잘못된 명나라 역사책을 수정하는 작업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김주는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북경에 들어서면서부터 이질(痢疾)에 걸렸던 그는 어지러움증과 발열증세로 9월17일 북경 옥하관(玉河館)에서 죽고 말았다. 김주가 죽자 임금은 예조판서를 증직하고 전(田) 30결과 외거노비 5명을 하사하였다.
선조 대에 이르러 종계변무 문제가 완전타결되자 1590년(선조23) 김주는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에 책록되었고 화산군(花山君)에 추봉되었다. 문장양망(文章養望)으로 선발되어 8문장(八文章)으로 불렸고 정유길(鄭惟吉)과 함께 문형(文衡)에 천거되기도 했으며 초서를 잘 써 따르는 이들이 많았다. 서경덕(徐敬德), 성운(成運), 김인후(金麟厚), 민기(閔箕) 등의 사림들과 우정이 깊었다. 시호는 문단(文端)으로 박학하고 문장에 능함을 문(文)이라 하고 예를 지키고 의리를 고수함을 단(端)이라 하였다. 묘는 흥천면 상백리(上白里)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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