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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여주인물을 소개합니다

역사속 여주인물을 소개합니다

  • 기자명 여주신문
  • 입력 2013.05.24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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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혼(慶渾) - 23

   
▲ 조성문(여주문화원 사무국장)
1544년(중중39) 4월. 경남 통영 사량진(蛇梁鎭)에서 왜변이 일어났다. 정승, 판서, 비변사당상들이 임금 면전에 모여 처리방안을 의논하였다.
 

결론은 이번 사건에도 불구하고 왜인들과의 무역·접대 등을 종전대로 하자는 것이었다. 발언권이 없었던 젊은 사관들이 이에 불만을 품고 실록에 기록을 남겼다. “국가가 왜놈에게 모욕을 받아 온 지 오래이다.


여론이 분격하였지만 거절할 만한 틈이 없다가 사량에 왜적의 변이 마침 이때에 있었으니 이른바 놓쳐서는 안될 기회이다. 조정에 모여 널리 의논하여 나라의 쌓인 분개함을 씻어 버려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인데 중의(衆議)는 놓아두고 한 두사람의 의견을 따라 국체(國體)를 약화시키고 왜놈들의 기세를 키워주는 짓을 하여 사기가 좌절되어 흥기할 의분(義憤)이 없어지게 하였으니 한탄을 금할 수 없다.” 이때 여론을 주도하며 왜인들에게 강력하게 대처할 것을 임금에게 주청한 사람이 경혼이다. 경혼의 주장은 “요사이 조정의 일을 보면 왜인들을 접대함이 너무 지나칩니다. 요청하는 사건은 마땅히 국가의 계획을 참작하고 요량하여 한번 결정한 다음에는 비록 백번을 요청하더라도 들어주지 않는다면 주도권이 우리에게 있게되어 그들이 무례한 말을 감히 하지 못할 것입니다.
 

지난번 일본국왕의 사신 수축(受竺), 계원(稽圓)이 왔을 적에 상품의 무역을 청하자 처음에는 비록 그 수량을 줄여 사기로 허락했었지만 그 뒤 패만(悖慢)한 언사가 많이 나오자 다시 의논하여 개정해서 마치 외구(畏懼)하는 듯하여 국가의 체면이 깎이었으므로 여론이 매우 분개하였습니다. … 또한 통역을 맡은 통사(通士)들이 뇌물을 받아먹고 왜인들의 외람된 술책이나 패만한 말은 물론 소소한 것이라도 모두 전달하고 우리 선위사(宣慰使)의 말을 그들에게 누설하니 징계하여야 합니다.…”였다. 일본의 도발에 대해 항구적인 대책없이 끌려만 가던 조선은 마침내 50년 뒤에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맞게 된다.
 

경혼(慶渾 1498∼1568)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언회(彦晦). 아버지는 경세청(慶世淸)이며 어머니는 김양완(金良琬)의 딸이다. 김안국(金安國)의 문인으로 1522년 진사가 되고 1533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검열, 장령, 헌납, 직강을 거쳐 사간이 되었다. 사간으로 있으면서 기묘사화(己卯士禍)때 화를 당한 조광조(趙光祖)등의 신원(伸寃)을 청하였다. 이후 우필선, 집의, 판교, 직제학, 대사간, 홍문관부제학이 되었다. 부제학으로 있을 때 시속(時俗)을 바르게 하는 일로 8개항의 상소를 올렸다. ①사로(仕路)를 맑게 할 것 ②간쟁을 받아들일 것 ③호상(好尙)을 삼갈 것 ④기강을 확립할 것 ⑤사습을 바로잡을 것 ⑥백성의 고통을 돌볼 것 ⑦사치를 억제할 것 ⑧군무를 다스릴 것 등이었다. 이에 대한 명종임금의 답이 이례적이다. “재변을 공연히 생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부르는 것이다. 아래에서 인사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위에서 재변을 내리는 것이니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근년 이래로 재변이 그칠 날이 없어 두려운 생각을 갖고 있던 차, 지금은 겨울인데도 서울에 천둥이 크게 치는 비상한 재변이 있으므로 걱정이 끝이 없다. 나의 허물을 듣고 싶던 참이었는데 이 상소의 내용을 보니 현재의 폐단을 바로 지적하였다. 내 비록 명철하지는 못하지만 어찌 유념하여 살피지 않겠는가? 대저 시속이 바르지 못한 것은 모두 내가 부덕하여 교화를 제대로 펴지 못한 소치이다.” 하였다. 1551년 문정왕후(文定王后)가 보우(普雨)를 중용하고 선교양종(禪敎兩宗)의 선과를 설치하려하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고 기신재(忌晨齋)의 시행도 극력반대하여 언관으로서의 바른 모습을 보였다는 평을 얻었다. 이후 여러 벼슬을 거쳐 좌부승지가 되었으나 원래 병약한 몸인데다 노쇠하여 대간의 탄핵을 받고 체직되었다. 장례원 판결사, 오위장 등을 역임한 뒤 70세로 죽었다. 묘는 흥천면 상백리(上白里)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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