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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고향

그리운 고향

  • 기자명 추성칠(본사객원논설위원)
  • 입력 2007.01.15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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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헤설피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정지용은 일본 유학중에 그리운 고향을 이렇게 멋지게 그려내었다.


고향에 들판과 실개천 없는 곳이 어디 있으랴. 높은 곳은 산이 되고 낮은 곳은 물이 흐른다. 산과 물이 만나는 곳에 이야기가 있다. 자연과 어울린 삶과 죽음 그리고 소원(所願)이 주제다. 처음 생긴 이야기는 전해오면서 살은 없어지고 뼈대만 남는다. 세월에 닳아진 이야기는 실개천을 지나 강과 만나면서 얘깃거리를 더한다.


산골짝에는 호랑이와 곰, 신선, 마귀할멈이, 물 주변에는 이무기와 용, 도깨비, 거북이가 나온다. 이야기는 지형과 인물과 맞물려 전설이 된다. 땅의 생김새와 종류에 따라 내용 또한 달라진다. 봉우리와 바위는 거북, 매, 말, 개, 칼 등의 이름이 붙으면서 폭이 넓어진다.


그곳에서 태어난 인물이 동원되면 더욱 현실과 어우러진다.


산에 있는 큰 바위들은 사람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다. 따라서 등장하는 것이 신선이고 마귀할멈이다. 자연과 순치하면서 이익이 되면 신선의 행동으로 구성되고 별로 쓸모가 없으면 마귀의 소행으로 치부된다.


강에 이르기 전 우리는 소(沼)를 만난다. 그 깊이를 재려면 명주실꾸러미가 몇 개가 필요하다고 한다. 물이 아무리 검어도 명주실꾸러미가 다 풀리도록 깊지는 않을 것이다. 재어보지도 않고 깊다고 하는 것은 자연에 대한 경외감이다. 들여다보아도 속이 보이지 않는 깊은 물과 같이 삶 또한 측정하지 못하는 불가해한 때문이다.


강물에는 이무기와 도깨비가 가장 많이 등장한다. 이무기는 용이 되지 못한 한풀이로 종종 인간에게 심술을 부린다. 사람이 물에 빠져 죽는 것은 이무기의 증오 탓이다. 숫자도 아홉 명, 열아홉 명, 용이 되기 위해 이무기는 부단히 죄 없는 생명들을 빼앗는다. 존재하지도 않은 이무기에게 현실의 어려움을 떠넘긴다. 그러나 우리는 단 한 명 때문에 안도한다. 이듬해 또 한 사람이 더 희생되어도 이무기의 목표는 또 아홉에 머문다.


도깨비는 용이나 이무기보다 더 현실적이다. 익살도 있고 사람을 돕기도 한다. 혹을 노래주머니로 착각하여 떼어낸다든지,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는 감투로 권선하며 징악한다. 술에 취한 장사(壯士)가 밤 새워 도깨비와 씨름하여 이기고 나서 묶어 놓았는데 아침에 보니 죽은 나무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사람이 도깨비를 이기는 것은 시간 때문이다. 날이 밝으면 도깨비의 역할은 사라진다. 이야기 속에는 허황돼 보이지만 암울한 현실을 인내하면서 미래를 기다리라는 묵시가 숨어있다.


여주의 지명 중에서 가장 탁월한 것이 고달사지의 “신털이봉”이다.


고달사의 크기와 적합하려니와 생김새 또한 그럴싸하다. 수많은 불자들이 고달사로 들어가면서 털어냈을 짚신에 묻은 흙, 그것이 모여 실제 봉우리를 이루었다면 고달사는 역사 속에서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신도들이 묻혀 온 것은 흙이 아니라 진정으로 버리고 싶었던 번뇌였을 터이지만, 멋진 이름으로 인해 고달사를 오래오래 기억한다.


토마스 프리드먼은 말한다. “언어가 사라질 때 문화도 죽는다. 물론 세상은 언어소멸이 아니더라도 본질적으로 갈수록 더 재미없는 곳으로 변해가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언어소멸과 함께 가공하지 않은 원초적인 지식과 천 년에 걸쳐 축적된 지적 성과물도 동시에 상실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느 단체가 청심루와 팔대수의 복원을 계획하고 있다고 한다.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건물만 복원해서는 안 된다. 그곳에 우리 선인들의 정신을 만날 수 있는 장소가 개설되어야 한다. 산골짜기에 개발로 인해 사라지는 수많은 이야기가 선인들을 만날 수 있는 장소일 것이다. 우리들 사이에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던 옛 이야기가 사라진다면 고향은 진정한 고향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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