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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와 토종의 생존

세계화와 토종의 생존

  • 기자명 조대현(본사객원논설위원,전여주군청지역경제과장)
  • 입력 2006.08.21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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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종의 사전적 의미는 그 땅에서 오래전부터 살고(서식)있는 동·식물의 종을 말하며, 이와 반대되는 귀화종은 다른 지역에서 들어와 그 지역에 자리 잡아 살고 있는 종을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현재를 기준으로 할 때 구별되거나 분류될 수는 있어도 사실 구별하기가 애매한 부분이 많이 있다.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인류의 역사를 최종빙하기가 끝난 1만3천년 전부터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토종이라 해서 1만3천년간을 한 지역에서 진화하고 번식해온 것이라고 볼 수 없으며, 생존 과정에서 더 좋은 환경으로 자리를 옮겨 살다가 살기에 가장 적합한 지역에 정착하여 대를 이어 살고 있는 생물을 흔히 토종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토종의 대부분은 지역풍토와 여건에 대한 적응과 종별 상호유대관계는 잘되어 있는 반면에 새로운 환경의 적응력이 약한 것이 흠이다. 그러기에 토종이 귀화종에 밀려 멸종되거나 귀화종이 새로운 토종으로 자리 잡는 경우가 생겨난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 낸다”라는 속담처럼 형편이 역전되는 변화가 자연의 섭리이다. 양봉(洋蜂)에 상대적으로 약한 토종벌이나 번식력이 강한 달맞이꽃, 돼지 풀, 리끼다소나무, 베스, 황소개구리, 붉은 귀거북 등처럼 귀화종이 우리 산야를 잠식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 생기는 것이다.

북아메리카 인디언과 남아메리카 인디오가 대대로 이어온 전통을 잇지 못하고 유럽계 종족에게 생활의 터전을 물려준 것도 총기와 기계문명에 뒤진 탓도 있겠으나, 이들에게 묻어온 세균과 바이러스에 의한 외래 질병에 의해 더 많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이 종족들이 지금은 오지에서 보호생활을 하며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나, 개량종에 밀려 산골 외진 곳 농가에서 볼 수 있는 우리나라 토종닭이나 그 신세가 다를 바 하나도 없다.

살기 좋은 사회란 말 그대로 마음편한 사회! 질서가 바로서고 서로 어우러져 생의 보람을 함께 누리는 사회이다. 질서와 문화는 그 지역의 주민이 이룩하여 놓은 생활전통을 바탕으로 싹틔워지고 지역주민의 노력과 정성을 거름삼아 키워진다.

세계는 1990년대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소련과의 냉전체제가 무너지면서 세계화라는 새로운 시스템이 형성되어 가로막고 있던 장벽도 함께 사라져 기술·정보·금융이 통합되는 이른바 세계화의 시스템이 형성되면서 사회의 엄청난 변화의 물결을 몰고 왔다. 과거 19세기가 기계문명과 이념 혁명의 시기였다면 지금은 세계화를 통해 사회질서와 문화가 구축되는 변화의 시대를 맞은 것이다.

토머스L. 프리드먼은 「렉서스와 올리브나무」에서 “현대와 미래의 건전한 글로벌사회는 렉서스(세계화 체제에서 현대화와 경제발전을 추구)와 올리브나무(과거사를 매듭짓지 못하고 그에 얽매여 있는 것)간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사회라고 했다” 이와 같이 토종이기만을 고집할 것도 아니고 분별없이 변화의 물결에만 휩싸일 수만도 없으며, 때로는 토종이기도 하고 때로는 귀화종일 수도 있도록 환경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지 않고서는 세계화의 흐름을 헤쳐나가기가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지금의 우리는 선사시대 이래 역대 왕조를 거치면서 헤아리기 어렵도록 많은 외침과 국란을 딛고 일어서 오늘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서 불행 중 다행으로 유라시아 등 외부세력으로부터 많은 문물과 종교, 과학, 수학, 의학, 농업 등의 문화를 받아들여 우리의 것으로 만들고 발전시켜 온 것도 이러한 맥락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기원전부터 외골수로 살아온 진정한 「토종」은 많지 않다는 것이며 반드시 토종이 우수하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지난 2000년 첫날 전 세계인류가 부푼 기대 속에서 새 밀레니엄이 되는 시간을 장엄하게 열고 기대에 찬 발걸음을 내딛게 된 것도 이러한 뜻에서 일 것이다.

그렇게 6년을 보낸 우리의 지금 현실은 어떠한 가를 되짚어 생각해보고 그동안 잘못된 부분이 있었다면 지금이라도 바로잡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념과 정당, 민족과 문명 그리고 문화의 차이를 극복하고 세계화의 물결에 함께 동승하여 인류의 진화를 이끌어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지금 시대에 우리가 함께 추구하는 목적이라고 할 것이다. 사람마다는 목적은 같더라도 수단은 다르게 할 수 있다. 그렇기에 공인(公人)은 자기목표 달성을 위한 수단보다도 공동이 추구하는 목적 추구를 앞세워야 한다. 목적과 수단이 다르게 되면 이상과 현실에 괴리가 발생되며 일의 선(先) 후(後)가 바뀌게 된다.

말이 앞에서 수레를 끌어야지 수레가 앞서고 말이 뒤에 있다면 그 수레는 영원히 한자리에 머무를 수밖에 없게 된다. 토머스 프리드먼이 제시했듯이 “지리에 근거한 근본적인 원인에서 출발해 제도를 형성할 직접적인 의존 변수들끼리 긴 역사적 연결고리 속에서 발생해 온 좋은 제도”를 찾아내기 위해 노력해야 할 지도자들이 자기 개인의 목표(입지, 체면)만을 의식한 채 민심을 바르게 읽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사회 현실과 미래는 불투명해 질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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